2012년 9월 21일 금요일

문화유산답사-수원 화성


수원 화성에 갔다. 화성은 정조대왕때 만든 성이다. 수원 화성은 방위의 목적외에도 서울을 대신할 신도시  개념으로 축조한 성으로 정조임금이 말년에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고 여생을 보내기 위해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정조임금이 사망하고 정순왕후가 정권을 잡자 화성 신도시 계획은 백지화되고 말았다. 수원 화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성으로 18세기 성 축조방식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문화재이다.


버스를 타고 창룡문에  내렸다. 수원 시민은 공짜로 입장이 가능하지만 일반 관람객의 경우 1000원의 입장료를 내야한다. 성벽길을 따라 산책하는 기분으로 걸으면서 화성과 그 주변 경치를 감상하였다. 화성은 성벽과 둘레의 전각을 제외하면 성 안과 밖이 모두 수원 시가지다.  화성 성벽의 가장 큰 특징은 아랬쪽은 화강암으로 위쪽은 벽돌로 쌓았다는 점이다. 자세히 보면 화강암 돌들이 모두 사이즈가 다른데도 불구하고 레고블럭처럼 가지런하게 쌓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크기가 다른 사각형의 돌들을 쌓다보면 분명 모서리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런 곳은 돌의 모서리를 깍아서 서로 맞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성벽을 따라 걷다보면 팔달문이 나오는데 현재는 보수공사중이다. 팔달문을 지나서 성은 언덕으로 이어진다. 언덕위에서는 수원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계속 걷다보면 장안문이 보인다. 장안문은 숭례문보다 더 큰 문으로 우리나라의 옛날 문 가운데서는 가장 큰 문이라고 한다. 화성 사대문의 특징은 성문 밖에 옹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문의 수비를 더욱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화성을 한바퀴 돌아 다시 창룡문으로 돌아왔다.

2012년 9월 12일 수요일

답사-서대문 형무소


8월 24일 토요일 오전 서대문 형무소에 갔다. 서대문 형무소는 일제 시대와 군사독재 정권 시절 독립운동가들과 정치범들을 수감했던 교도소로 1987년 형무소가 의왕시로 이전한 이후로는 역사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서대문 형무소는 1907년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한 이후 일제가 만든 형무소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던 많은 분들이 이곳에 수감되었으며 또한 많은 분들이 이곳에서 죽어갔다.

역사관에는 일제강점기 때 이곳에 수감되었던 많은 독립운동 지사들의 사진들이 벽에 빼곡히 붙여져 있었다. 3.1운동 당시 체포되어 수감되었던 한용운 선생의 사진도 볼 수 있는데 정면을 향해 노려보는 눈빛이 아주 매섭고 인상적이었다. 또한 유관순 열사의 사진도 볼 수 있었다. 유관순 열사는 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다 옥사 하였다. 일본놈들은 심지어 유관순 열사의 시신을 아주 잔혹하게 훼손하였다고 한다.

일제는 이곳 형무소에서 독립운동가들에게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고문을 자행하였다. 역사관에는 당시 고문의 모습과 고문에 사용했던 기구들을 전시해 놓고 있었다. 한 나라의 주권을 침탈하고 그 국민들을 복종시키기 위해서 그들은 이런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다.
 

이곳에는 일제시대 때 이육사와 함께 수감생활을 했던 이병희 지사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고문 두려워 하면 독립 운동 할 수 없다.” 그들은 잔인한 고문과 비인간적인 수감생활을 할 각오를 하면서 독립운동을 한 것이다.
자신을 희생하면서 독립을 위해 싸운 분들이 있었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일신의 영달을 위해서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은 친일파들도 있었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일제에 의해 착취를 당했지만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들은 작위를 받고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들이 해방후에도 우리 사회의 주류가 되었다는 점이다. 해방 후 친일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친일파들은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 건재해 있다.

넓은 서대문 형무소 한 곳에는 사형 집행장이 있다. 이곳에서 사형수들을 교수형에 처하였다. 사형대에서 죽은 시신은 가족들에게 인계 되었지만 연고자가 없는 경우는 화장터로 보내졌다. 그러나 고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서 시신을 강제로 화장 해버리는 경우도 많았다.

서대문 형무소는 일제시대 뿐만 아니라 유신 시대에도 정치범들을 수용했던 곳이다. 형무소 곳곳에서 당시의 비인간적인 수감 생활을 확인 할 수 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군사독재 정권이 서로 바톤 터치를 했을 뿐 이 곳 형무소에서 잔인한 고문과 인권 탄압은 계속되었다.

2012년 9월 2일 일요일

치욕의 역사를 간직한 창덕궁


창덕궁은 종묘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궁궐로 가장 한국적인 궁전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파괴된 후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기 전까지 창덕궁은 창경궁과 함께 정궁의 역할을 하였다. 정조대왕을 비롯하여 조선 후기의 임금들이 주로 거처 하던 곳이 바로 이 창덕궁이다. 또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거처하던 궁궐이 바로 창덕궁이다. 현재의 창덕궁은 순종 당시의 모습이라고 보면 된다.


창덕궁의 정문은 돈화문이다. 왕궁의 정문은 덕수궁을 제외하고 다 화(化)자 돌림이다. 경복궁은 광화문, 창경궁은 홍화문이다. 입장료는 궁궐 일반 관람이 3000원, 후원까지 관람할 경우 8000원인데, 가격이 꽤 많이 올랐다. 창덕궁 후원은 두 번 구경하였는데 반드시 가이드의 인솔을 받아야 한다. 오늘은 궁궐 관람만 하기로 했다.

돈화문을 지나자 안내방송이 들렸다. 곧 한국어 가이드의 설명을 들을 수 있는 투어가 시작된다고 한다. 가이드를 따라서 정조 때 만들었다는 규장각도 보고 궐내각사를 두루 돌아보았다. 가이드는 안내 책자에 나오지 않는 세밀하고 중요한 내용들 까지도 꼭 집어서 말해 주었다.


창덕국에는 경복궁에 비해 유독 일본인 관광객들이 많다.  왜 유독 창덕궁에 일본인들이 많이 올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그것은 창덕궁이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이 거처하던 곳이라는 사실에서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 같다. 순종은 일제에게 나라를 건네준 인물이다. 그는 아버지 고종에 비해 나라를 지키려는 의지도 없었고 카리스마도 없는 인물이었다. 고종은 을사조약이후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하는등 마지막까지 나라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노력을 했다. 그로 인해 그는 일제에의해 강제로 퇴위를 당했다.

하지만 고종을 이은 순종은 그야말로 이름뿐인 황제였다. 순종은 병약하여 후사도 없었으며 일본이 내려준 이왕이라는 작위로 창덕궁에서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따라서 창덕궁은 일왕이 임명한 왕인 순종이 거처하던 곳으로 일제의 조선 식민지 지배를 상징하는 곳이다. 그리고 창덕궁은 한일 합방 조약이 체결된 곳이다. 창덕궁 대조전이 바로 한일합방 조약이 체결된 곳이다. 이렇듯 창덕궁은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치욕의 장소이지만 일본놈들에게는 조선 식민지 지배와 과거의 영화에 대한 향수가 남아있는 곳이다. 일제 강점기에 창덕궁을 보수할 때 일제는 경복궁의 전각을 허물어 자재를 충당했다. 새로운 자재를 사용하지 않고 궂이 경복궁의 전각을 헐어버린 이유는 경복궁이 조선 왕조의 법궁으로 조선의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이 창덕궁을 많이 찾는 이유를 이제 알 수 있을 것이다.

가이드를 따라서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과 대조전을 구경하였다. 인정전 안에는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는 것이 특이한데 순종은 이곳에서 주로 연회를 열었다고 한다. 대조전은 왕비가 거처하던 곳으로 다른 궁궐들과는 달리 문이 창호가 아닌 유리로 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대조전에는 순종황제와 왕비가 사용하였던 가구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순종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자동차를 타고 다녔던 왕인데 차를 타고 내리기 편하도록 전각을 고친 모습도 볼 수 있다.

가이드를 따라 마지막으로 낙선재를 구경하였다. 낙선재는 영친왕의 비 이방자와 고종황제의 마지막 딸인 덕혜옹주가 생을 마감한 곳이다. 원래 낙선재는 헌종 임금이 자신이 총애하던 후궁을 위해 지어준 전각이라고 한다.


2012년 8월 29일 수요일

문화유산 답사-남한산성


8월 26일 일요일 남한산성에 갔다. 지하철 8호선을 타고 산성역에서 내려 52번 버스로 환승해서 남한산성 남문에서 내렸다. 남문에는 지화문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남한산성에는 4개의 성문이 있다. 그 중 남문과 동문이 사용 빈도가 높은 곳이라고 한다.

남문에서 약 1km정도 산책로를 따라 올라가면 수어장대가 나온다. 수어장대는 남한산성 수비대의 총사령부와 같은 곳이다. 수어장대 옆에는 무망루라는 누각이 있고 그 안에는 비석이 놓여 있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에 맞서 인조임금이 47일동안 항전을 펼쳤던 곳이다. 그러나 군량미가 떨어지고 세자가 강화도에서 생포되자 결국 항복하게 된다. 무망루는 그 때의 일을 상기하며 영조임금이 세운 누각이다.

수어장대 바로 옆에는 청량당이라는 작은 사당이 있다. 청량당은 남한산성을 축성한 장군 이회를 추모하기 위한 사당이다. 남한산성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국가 재원이 들어가는 거대한 토목 사업이었다. 그런데 수어장대쪽 축성을 담당한 이회 장군이 공사비를 횡령했다는 누명을 쓰고 문초끝에 처형을 당한다. 그리고 장군의 부인도 남편을 따라 강물에 뛰어들어 자결을 하였다. 그런데 얼마후에 이회장군이 죄가 없고 억울하게 죽었음이 밝혀지자 이곳에 장군을 모시는 사당을 지었다.

수어장대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서문이 나온다. 서문에는 우익문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서문은 남한산성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문으로 그렇게 많이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송파나루에서 가깝기 때문에 전쟁 물자를 한양에서 긴급히 수송할때 이용되었다고 한다. 남한산성의 성벽은 산의 능선을 따라서 둘러져 있다.


서문에서 성벽을 따라 내려가면 북문이 나온다. 북문은 전승문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병자호란 당시 약 300명의 병사들이 이 문을 나와 청군을 기습하려고 했으나 청군의 계략에 말려 모두 몰살당하였다.

전승문에서 조금 내려오면 종로 거리가 나온다. 남한산성은 산성안에 마을이 있어서 예로부터 산성리라고 불리웠다고 한다. 남한산성의 읍락이었던 이곳은 지금은 등산객들을 위한 음식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종로에서 조금 올라가는 남한산성 행궁이 있다. 행궁이란 임금이 거처하는 도성밖의 궁궐을 의미한다. 남한산성 행궁은 복원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행궁의 정문은 한남루라는 누각인데 다른 궁궐의 정문과 달리 이층 누각인 것이 특이하다.


한남루를 지나면 고증을 통해 복원한 정방형의 연못이 있고. 행각을 지나면 외행전과 내행전이 나온다. 행각은 주로 궁녀나 수비군들의 처소로 이용되던 곳이고 임금이 정무를 보는 곳은 외행전 침전은 내행전이다. 특이한 점은 외행전 마당 옆에 통일신라시대때 집터가 보이는데 남한산성 행궁의 발굴 및 복원 과정에서 발견된 것이라고 한다. 이 집터는 신라시대 건축 양식으로 복원예정이라고 한다. 내행전의 뒤편으로는 이위정이라는 정자가 있고 후원이 있어서 온전한 궁궐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남한산성 행궁은 종묘와 사직을 갖추고 있는 유일한 행궁으로 유사시에 이곳이 수도로서의 역할을 했었음을 알 수 있다.

마침 외행전 마당에서는 조선시대 전통 무술 시범 공연이 벌어지고 있었다. 행궁 구경을 마치고 배가 고파 옥수수를 산 후에 침괘정이 있는 언덕으로 올라가 벤치에 앉아서 먹었다. 침괘정은 군사용으로 만든 전각이라고 하는데 마당에는 화약을 만들었던 터가 남아 있다.

침괘정에서 아래로 내려오면 연무관이라는 전각이 보이는데 마찬가지로 군사시설로 지어진 전각이다. 연무관에서 아래로 내려오면 현절사라는 사당이 있다. 현절사는 병자호란 때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여 청나라에 끌려가 순절한 삼학사를 기리기 위해 숙종 때 지어진 사당이다. 하지만 정문이 잠겨 있어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현절사에서 조금 내려오면 남한산성 역사기념관이 있다. 안에 전시된 유물들은 별로 볼게 없지만 전시관내 TV에서는 남한산성의 역사를 소개해주는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었다. 역사 기념관에서 조금 내려오면 지수당이라는 연못과 정자가 있다. 그 아래로 더 내려오면 동문이 있다.

병자호란때 조선이 청나라에 배한 이유는 남한산성이 함락되어서가 아니라 오랜 항전으로 인해 식량이 바닥났기 때문이다. 남한산성은 매우 견고한 성이다. 인조가 항복을 한 후에 북벌론이 제기되었을 때에도 남한산성은 또한 북벌론의 중심지가 되었다.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은 북벌을 위해서 남한산성을 보수하고 이곳에서 군사들을 조련시켰다. 하지만 북벌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2012년 8월 24일 금요일

문화유산답사-덕수궁


덕수궁의 원래 이름은 경운궁이다. 덕수궁이란 명칭은 고종황제의 휘호가 ‘덕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일제에 의해 강제적로 퇴위당한 고종황제의 휘호를 그대로 썼기 때문에 이 또한 문제가 있어 보인다. 어쨌든 덕수궁은 고종황제가 아관파천후에 약 10년간 대한제국의 황제로 군림했던 곳이고 함녕전에서 돌아갈 때까지 머물렀던 궁이다.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을 들어서면 금천교가 보인다. 물이 흐르지 않기 때문에 다리라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지만 금천교를 지나면 우뚝한 나무들이 있는 아름다운 산책로가 펼쳐진다. 산책로를 따라 걷다보면 중화문이 보이고 중화문을 지나면 중화전이 보인다. 중화전은 덕수궁의 정전으로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과는 몇가지 차이점이 있다. 이층으로 된 월대에는 난간이 없고 석수도 없다. 그리고 근정전이 복층인데 비해 중화전은 단층이고 창호도 푸른색이 아닌 황제를 상징하는 노란색이다. 뿐만 아니라 월대의 돌계단에 있는 답도에는 봉황이 아닌 용이 새겨져 있어서 이곳이 황제가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중화전 뒤편으로는 석어당과 즉조당이 있다. 석어당은 덕수궁의 유일한 2층 전각으로 단청이 없는 것이 특이하다. 이곳은 광해군 때 인목대비가 유폐되었던 곳이다. 전각의 2층은 마치 다락방처럼 슬림한 것이 이색적인데, 이런 양식의 전통 가옥은 쉽게 보기 어려울 것 같다.

즉조당은 고종이 황제즉위식을 가졌던 곳이다.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을 겪으면서 고종은 마음을 굳게 먹고 나라를 일신하기 위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변경하고 황제에 오른다.


고종은 급진적인 개화나 척화론을 모두 배격하고 과거의 것을 존중하면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의 정신을 슬로건으로 내 걸었다. 외세에 의존한 급진개화사상이나 서구문물을 무조건 반대하는 위정척사사상을 배제한 중용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석조전은 우리나라 궁궐에 남아 있는 유일한 서양식 건물이다. 석조전은 신고전주의 양식의 고종의 의지로 지어진 건물이다. 지금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일제에 의해 경복궁과 창경궁에 지어졌던 서양식 건물들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석조전은 현재 준공 당시 내부 모습을 복원하기 위해 공사중이다. 석조전 앞에는 분수대와 정원이 있다. 이것은 영국인 건축가에 의해 지어진 서양식 정원이다. 석조전 옆에는 별관 건물이 있는데 현재는 덕수궁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석어당에서 정문쪽으로 내려오면 침전인 함녕전과 덕홍전이 있다. 함녕전은 고종이 승하한 곳으로 내부에 서양식 샹들리에가 있는 것이 특이하다. 고종은 서양 문물에 관심이 많았고  이를 받아들이는데 매우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함녕전에서 뒤편으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정관헌이 나온다. 이 건물도 참 독특하다. 이곳은 고종이 휴식을 취한 정원인데 전통적인 정자가 아닌 서양식 건축이다. 러시아의 건축가 사바친이 설계하였는데 전체적인 모습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처럼 보이지만 기둥이 나무고  전통 한옥처럼 팔각 지붕이지만 처마는 없다. 정관헌은 전통건축과 서양건축을 융합시킨 독창적인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으로 덕수궁 관람을 마쳤다. 현재의 덕수궁은 고종 당시에 비해 많이 축소된 것이다. 현재 시청앞 광장과 환구단 그리고 구세군교회와 조선일보 건물이 있던 곳까지 덕수궁터였다. 석조전 뒤편으로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걷다보면 정동공원이 나오는데 공원 위쪽에 구 러시아 공사관의 조망탑이 남아 있다. 을미사변 이후 러시아는 고종이 가장 신뢰했던 나라였다. 고종이 아관파천후 덕수궁으로 환어한 이유도 러시아 공사관이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종이 황제에 오르면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환구단은 현재 프레지던트 호텔 뒤편에 있다. 현재는 황궁우와 석고 그리고 정문만 남아 있다. 황궁우는 선왕의 신위를 모신 단으로 3층의 육각 전각이 웅장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현재 황궁우 주변은 도심속 공원으로 일상에 지친 시민들의 작은 쉼터가 되어 주고 있다.

2012년 8월 19일 일요일

문화유산 답사-경복궁



광화문광장에서 광화문으로 가려면 횡단보도를 두 번 건너야 한다. 광화문에서 오른쪽으로 좀 가면 동십자각이 보인다. 예전에는 경복궁 돌담길을 걸으면서 사거리에 외롭게 서 있는 누각을 별 관심도 없이 지나쳤다. 사실 동십자각은 경복궁 성벽의 동쪽 끝 망루였다. 광화문 앞에는 좌우로 두개의 해태(해치)상이 있다. 해태는 상상속의 동물로 궁궐을 지키는 상징적인 존재다. 경복궁에는 곳곳에서 해태상을 볼 수 있다. 광화문은 2010년에 예전의 모습대로 복원 공사가 완료되었는데 서울의 상징으로 그 위용이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경복궁의 출입구는 흥례문이다.  흥례문은 예전 중앙청 건물이 있던 곳에 복원한 것이다. 중앙청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시피 일제의 조선총독부 건물이다. 조선 왕궁 한복판에 총독부 건물을 세운 것을 보면 일제가 얼마나 교활했었는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한동안 정부종합청사 박물관 등으로 쓰이다가 1996년 역사 바로세우기 차원에서 철거했다.

흥례문을 지나면 또 하나의 문이 보이는데 바로 근정전의 정문인 근정문이다. 마치 양파 껍질 벗기듯 정문을 3개나 통과해야 비로소 근정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멀리 북악산을 배경으로 한 근정전의 풍경은 매우 훌륭하다.


근정전에서 오른편으로 가면 수정전이 있다. 수정전은 과거에 집현전 건물이었다. 수정전 뒤쪽으로는 두개의 굴뚝이 있어서 겨울철에 집무를 보는 신하들을 배려했음을 알 수 있다. 수정전 뒤편에는 경회루가 있다. 북악산을 배경으로 연못위에 떠 있는 경회루의 모습은 한폭의 동양화를 연상시킨다. 경회루는 가장 전형적인 한국의 미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근정전 뒤쪽으로는 왕의 집무실인 사정전이 있다. 사정전의 양 옆으로는 만춘전과 천추전이 있는데,  사정전과는 달리 만춘전과 천추전에는 뒤편에 굴뚝이 있다. 사정전의 오른편으로는 세자가 거처하는 동궁전이 있다. 동궁전에는 현재 자선당과 비현각 두채의 전각이 남아 있다. 자선당은 세자와 세자빈의 거처이고 비현각은 세자가 공부 하고 정무를 보던 곳이다. 사정전 뒤편으로는 왕의 침전인 강녕전이 있고 그 뒤편으로는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이 있다. 강녕전과 교태전의 지붕에는 용마루가 없다는 점이 특이하다.

교태전 뒤편으로는 아미산이라는 정원이 있는데 굴뚝이 무척 아름답다. 교태전의 우측으로는 자경전이 있다. 자경전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궁궐의 어른인 신정왕후를 위해 아주 크고 화려하게 지은 것이다. 신정왕후는 철종의 후계자로 고종을 지명하여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장악하는데 큰 도움을 준 정치적 은인이다. 자경전의 뒤편으로는 십장생굴뚝이 있다. 이것은 십장생을 벽에 새긴 일종의 벽화로 이것은 신정왕후의 만수무강을 기원한 뜻이 있다.

교태전 뒤쪽으로는 후궁들의 처소인 함화당과 집경당이 있다. 원래는 궁녀들이 거처하는 전각들이 더 있었으나 지금은 두개만 남아 있다. 경복궁이 중건되었을 당시에는 지금보다 전각이 훨씬 많아서 아주 웅장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일제가 이런 저런 명목으로 전각들을 하나 둘 해체하면서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한 것을 90년대에 본격적으로 복원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은 그나마 전체적인 형태와 기본 골격은 예전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다.


함화당의 뒤편으로는 향원정이 있다. 향원정의 연못은 온통 연꽃으로 덮여 있었다. 육각의 정자와 아름다운 연못 그리고 뒤편의 북악산이 만들어내는 경치는 경복궁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다. 경복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이 향원정을 꼽고 싶다. 향원정 뒤편에는 건청궁이 새롭게 복원되었다. 건청궁은 고종이 아버지 흥선대원군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지은 작은 궁전으로 일반 양반집의 형태로 지은 것이다. 건청궁에는 왕의 처소인 장안당과 왕비의 처소인 곤녕합이 있다. 곤녕합은 바로 을미사변때 명성황후가 일본의 무사들에 의해 살해되었던 곳이다. 건청궁은 최근에 복원된 것으로 예전에는 빈터 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건청궁 바로 옆에는 집옥재라는 독특한 건물이 있다. 집옥재 좌우에는 팔우정이라는 청나라풍의 팔각형 누각과 협길당이라는 조선풍의 전각이 있어서 청풍과 조선풍이 조화를 이룬 건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팔우정은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전각으로 눈여겨 볼만하다. 집옥재에서 좌측으로 가면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을 볼 수 있다. 신무문 앞은 경복궁의 출입문이 설치되어 있어서 가까이 가보지는 못했지만 멀리서 모양을 확인할 수는 있었다.

신무문에서 다시 내려오면 궁중의 장독대를 모아두었던 장고가 있는데 지금은 팔도의 독 항아리를 전시하는 곳으로 복원해 놓았다. 경복궁 옆에는 국립민속박물관이 있다. 민속 박물관은 예전 한국인의 생활 모습을 전시한 곳으로 사실 그다지 볼 것이 많지는 않다. 이것으로 경복궁 답사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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