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 16일 수요일

시리아 난민 사태의 본질

현재 내전중인 시리아를 탈출해 유럽으로 가려는 난민들이 행렬을 이루고 있다. 또한 얼마전에는 터키해변에서 발견된 세살짜리 난민 어린이의 시체가 세계를 경악하게 했다. 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시리아를 탈출해 유럽으로 또는 세계 각지로 난민 행렬을 이루고 있을까. 현재 시리아에는 정부군과 반군사이에 교전이 벌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ISIS(이슬람국가)라는 테러단체가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다. NATO와 미국은 ISIS에 대하여 공습을 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시리아에서 ISIS가 괴멸되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ISIS는 나날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NATO의 군사력으로 ISIS를 소탕하는 것은 어린아이 손목을 비트는 것만큼 쉬운 일이다. 하지만 미국과 NATO는 ISIS소탕에는 관심이 없다. 심지어 미국은 시리아와 이라크의 혼란을 초래하기 위해 ISIS를 은밀히 지원하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ISIS에는 수많은 유럽과 미국의 백인들이 가담하고 있다. ISIS(이슬람국가)는 헤즈볼라나 하마스같은 이슬람무장세력도 아니고 그렇다고 국가는 더더욱 아니다. ISIS는 미국의 지원을 받는 테러집단이라고밖에 말 할 수 없다. 시리아는  2011년 중동지역의 민주화 시위 소위 아랍의 봄 이후 내전에 휩싸여 있다. 당시 리비아의 카다피는 축출되어 처형되었으나 시리아의 아사드(Assad)는 여전히 건재해 있다. 미국과 서방은 2011년 중동지역의 민주화 시위를 이용해 중동지역의 반서방 세력인 카다피정권과 아사드정권을 무너뜨릴 계획이었다. 카다피는 축출하는데 성공했으나 아사드는 실패했다. 이는 시리아가 러시아와 구소련시절부터 군사동맹관계를 맺고 있고 현재도 러시아로부터 군사지원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국과 유럽이 아사드를 축출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미국은 시리아 반군을 지원을 하고 있으나 그것만으로 아사드를 축출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래서 미국은 ISIS를 이용하여 시리아의 내부혼란을 극대화하고 시리아의 민심이 이탈하여 아사드정권을 붕괴시키려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미국의 전략은 대규모 난민들이라는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하고 말았다. 수만명의 시리아 난민들이 내전과 테러의 위협을 피해 유럽으로 서방으로 피난행렬을 이루고 있다. 미국은 ISIS와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사드정권과 싸우고 있는 것이며 미국의 지원을 받는 반군과 ISIS가 결국 난민을 양산한 것이다. 이는 미국과 유럽의 자업자득이며 난민들에 대해 백퍼센트 책임이 있다. 중동지역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 미국의 대중동정책이 난민행렬의 근본적 원인인 것이다.

2015년 9월 11일 금요일

발해는 한민족의 역사인가?

과거에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시기부터 후삼국으로 분열되기까지의 시기를 통일신라시대라고 불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 시기를 발해를 포함한 남북국시대로 부르고 있다. 이는 발해를 한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국가로 보는 역사관을 반영한 것이다. 발해는 고구려가 멸망한 후 중국의 동북지방과 러시아의 연해주 일대에 세워진 국가이다.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발해를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 연합해서 세운 국가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중국,러시아,일본의 사학자들은 발해를 고구려나 한민족과는 무관한 국가로 보고 있다. 중국은 고구려와 발해를 중국의 소수민족들이 세운 지방정부로 보고 있다. 한편 러시아는 발해를 말갈족(만주족)이 세운 국가로 보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이후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등 한반도의 역사가들도 일관되게 발해를 한민족의 역사에서 배제하였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사이에 같은 민족이라는 의식조차 형성되지 않았다. 발해를 한민족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최초의 시도는 조선후기 실학자들에 의해서였다. 그들이 발해를 한민족의 역사로 편입하고자 한 이유는 조선후기 내부사회의 모순과 이에 대한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증거가 부족하였다. 만약 발해를 한민족의 역사로 본다면 발해의 영토였던 만주와 연해주를 잃어버린 한민족의 실지로 인식하게 하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는 중국뿐만 아니라 러시아와도 정치군사적 마찰을 일으키게 할 소지가 있는 부분이다. 일본이 과거 조선을 병합할 때 내세웠던 명분은 조선과 일본의 조상은 하나라는 것이었다. 일본의 침략자들은 일본과 조선은 하나의 민족이므로 일본의 조선합병은 정당하다는 논리를 폈다. 히틀러가 오스트리아와 체코를 병합할 때도 같은 논리를 폈다. 오스트리아와 체코는 혈통상 게르만민족이기 때문에 같은 게르만족인 독일이 병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파시즘적 확장주의 역사관이다. 발해를 한민족의 역사로 인식하는 것 또한 확장주의 역사관이다. 한민족은 통일신라이후에 한번도 영토확장을 꾀해본적이 없다. 한민족은 천년에 걸쳐 거란족, 몽고, 후금, 왜, 일본등으로부터 끊임없는  침략을 받았다. 그러나 한민족은 단 한번도 침략전쟁을 일으킨 적이 없다. 이것은 한민족의 소중한 전통이다. 한민족은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다. 한민족은 앞으로도 영토확장을 꾀하거나 침략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발해를 한국사로 편입하고 남북국 시대를 주장하는 확장주의 역사관을 경계해야 한다.

2015년 8월 25일 화요일

중국은 과연 2차대전 전승국인가?

중국이 2차대전 항일 전쟁 승리 70주년을 기념해 9월3일 전승절 군사퍼레이드를 실시한다. 중국이 9월 3일에 군사 퍼레이드를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중국이 항일전쟁(중일전쟁) 승리 기념일을 9월 3일로 정한 이유는 일본이 미주리함에서 미국에 항복서명한 날이 1945년 9월 2일이었고 중국은 그 다음날 승리를 선포했기 때문이다. 중국은 일본으로부터 공식적인 항복을 받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과연 중국이 떳떳하게 2차대전 전승국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중일전쟁은 1937년 7월 7일 발발하였고 이후 8년동안 중국을 전쟁의 참화로 몰아넣었다. 무기와 군사력에서 절대적으로 열세였던 국민당 정부군은 전쟁발발 직후부터 일본에 밀리기 시작하여 충칭으로 임시수도를 옮기고 서부 산악지대를 근거로 지구전을 펼쳐야만 했다. 중국군은 일본군에 제대로 반격 한번 해보지 못했다. 반면 일본은 동부해안지대에서 북경-서안-장사-계림에 이르는 지역을 점령하고 중국군을 궤멸 직전까지 몰아갔다. 장개석의 국민당군과 모택동의 팔로군(공산군)은 전쟁기간동안 일본에 일방적으로 밀리기만 했다. 그들은 그저 버틴 것에 불과했다. 1945년 8월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고 소련이 8월 8일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로 진격하자 전세는 역전되었다. 만약 미국과 소련이 참전하지 않았다면 중국은 정말로 일본에 궤멸될 수도 있었다. 중국은 2차대전에서 승리를 한 것이 아니라 승리를 어부지리로 얻었을 뿐이다. 2차대전의 진정한 전승국은 미국과 소련뿐이다. 중국이 그동안 9월3일 전승절 군사퍼레이드를 하지 않은 이유는 자신들이 일본에 승리했다고 주장하기 어려워서였다. 1894년 청일전쟁(갑오전쟁) 이후 중국은 일본과의 전쟁에서 한번도 이긴 적이 없다. 중국에게 9월3일은 그저 이름뿐인 전승절이었다. 이번 9월3일 전승절 퍼레이드는 중국이 중일전쟁때 굴욕을 당했던 일본에게 군사력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다. 청일전쟁이후 2차대전 종전까지(1894-1945) 중국은 경제력과 군사력에서 모두 일본에 뒤졌다. 그것이 중일전쟁에서 일본에 밀린 이유였다. 그러나 70년이 지난 후 중국은 핵보유국이 되었고 경제력과 군사력 모두 일본을 추월하였다. 하지만 일본이 과거침략사와 전쟁범죄를 부정하는 것이 역사왜곡이듯이 중국이 2차대전 전승국이라고 주장하는 것 또한 과거 굴욕의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다. 전쟁의 어두운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역사를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2015년 8월 11일 화요일

광복 70주년의 진실, 이름뿐인 광복

올해는 광복 70주년이자 전세계 반파시스트 전쟁 승리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1945년 나찌독일과 일본군국주의세력은 패망하였고 그로인해 한국은 독립 할 수 있었다. 1945년 7월26일 연합군은 포츠담선언을 통해 일본에 무조건 항복과 함께 전쟁을 통해 획득한 영토를 모두 반환할 것을 종용하였다. 일본이 이를 거부하자 1945년 8월 6일과 9일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이 투하되었고 8월8일에는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후 소련군은 만주로 쳐들어가 일본군을 궤멸시켰고 8월 9일에는 이미 두만강을 넘어 조선북부로 진격하여 함경도 일대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8월 15일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이후에도 소련군은 진격을 계속하여 8월24일에는 평양을 점령하였고 만주에서는 뤼순을 함락시켰다. 일본관동군은 8월19일 소련군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 하였고 8월 30일에는 만주와 조선북부에 주둔한 관동군에 대한 무장해제가 이루어졌다. 한편 미국은 사이판,이오지마,오키나와를 차례로 함락시키고, 일본열도에 인류역사상 최초로 핵폭탄을 투하시켰다. 미국의 핵폭탄 투하와 만주에서 소련군에게 참패함으로써 일본은 사실상 전의를 상실하였다. 8월 15일 일본은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고, 9월 2일 미주리함 선상에서 공식적으로 항복문서에 조인하였다. 1894년 청일전쟁(갑오전쟁)승리, 1905년 러일전쟁승리 이후 승승장구하며 조선을 식민지화한데 이어 중국을 침략하고 동남아시아까지 세력을 확장한 일본제국주의는 이렇게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한국에게 광복은 무슨 의미일까? 1910년 한일합병 이후 한반도는 일본의 영토였는데 1945년 8월15일 이후에 한반도 북부에는 소련군이 남부에는 미군이 진주하면서 사실상 미소 양진영에 의해 분할점령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한국은 전세계 파시스트전쟁(제2차세계대전)에서 일본에 맞서 싸운 나라인가, 아니면 일본과 함께 싸운 나라인가라는 근본적인 의문이 생긴다. 1910년 대한제국의 멸망이후 1919년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임정은 김구를 중심으로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싸웠다. 임정은 윤봉길,이봉창등을 통해 일본에 대한 의열투쟁을 벌였고 여기에 김원봉도 가세했다. 그리고 제2차세계대전 중에는 광복군을 조직하여 중국 국민당, 공산당 군대와 함께 중국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하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승전국의 지위를 얻지 못했다. 1945년 광복 이후에 김구,김규식등 임정 인사들은 승전국 요인이 아니라 개인자격으로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임시정부가 승전국 지위를 얻지 못한 데는 일본을 패망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평가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분명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싸웠다. 한편 식민지 조선에서는 친일파들이 일본의 총동원령에 부응해서 조선인들의 강제징집과 전쟁물자제공에 앞장서기도 했다. 그들은 사실상 일본제국주의와 함께 연합군에 맞서 싸운 세력들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파시스트들과 맞서 싸운 나라인가 아니면 파시스트와 함게 싸웠던 나라인가? 임시정부의 법통을 인정하는 사람들이라면 전자를 선택할 것이고 친일파들은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최근 대통령 동생 박근령의 '천황폐하','신사참배 안하는게 패륜'등의 극친일 망언이 화제가 되고 있다. 박근령은 이에 대해 자신은 침묵하는 다수를 대변했다고 항변하기까지 했다. 박근령의 부친인 박정희는 일제시대 만주국 장교로 일본파시스트세력과 함께 만주에서 중국과 임시정부에 맞서 싸운 인물이다. 당시 박정희의 일본 이름은 '다까끼 마사오'였다. 박근령의 발언은 한국은 전세계 반파시스트전쟁에서 일본과 함께 싸운나라였다는 역사인식을 반영한다.
1910년(정확히 말하면 1905년 을사늑약이후)한반도는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고 1945년 명목적으로 광복을 맞이했으나 그것은 또다른 식민지 상황의 도래나 다름없었다. 미군정하에서 친일청산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친일파들이 미군을 등에 없고 민족주의세력과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였다. 일본 군국주의세력과 맞서 싸웠던 김구등 임정세력들은 귀국후 완전히 와해되고 말았다. 광복70주년인 오늘날도 한반도의 이남은 여전히 미국군대가 주둔하고 있고 친일파의 후손들이 재계,언론,관료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광복70주년을 맞아 서울시내 한복판에는 임시정부의 상징인 대형 태극기가 걸려 있지만 한국사회는 아이러니하게도 친일파들이 장악하고 있다. 1945년의 광복은 이름뿐인 광복이었다.

2015년 8월 7일 금요일

영화 '암살'을 보고

영화 '암살'을 관람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항일의열투쟁을 다룬 영화다. 이 영화 김구,김원봉등 일제강점기 의열투쟁에 앞장섰던 항일독립운동가들을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한다. 김구는 임시정부의 주석으로, 김원봉은 조선의용군의 수장으로 각각 중국에서 항일무장독립운동을 한 인물들이다. 그러나 한국의 일부 극우세력들은 김구를 '테러리스트', 김원봉은 '빨갱이'로 부르고 있다. 또한 영화 '암살'은 김구 김원봉과 함께 이들을 도와 항일 무장 투쟁을 한 수많은 무장투쟁가들을 부각시켰다는 점도 평가할 만 하다. 이들이 총과 폭탄을 들고 일본의 침략세력들에게 저항한 사실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하지만 일본의 밀정 염석진이 반민특위에서 무죄판결받는 장면은 씁쓸한 여운을 안겨준다. 염석진이 재판을 받고 나오자 길거리에는 "반민특위 해체하라, 북진통일 이룩하자."를 외치며 시위를 하는 극우 시위대의 모습이 나온다. 해방 후 친일파들이 반공세력으로 둔갑하여 민족주의자와 독립운동가들을 오히려 탄압했던 사실을 이 영화는 각인시켜주고 있다. 염석진이 안옥윤에게 암살당하는 장면은 어디까지나 영화속의 허구다.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 장교의 딸이 대통령이고 그 동생은 한술 더 떠"천황폐하"운운하며 "신사참배 안하는게 패륜"이라는 망언을 하는 나라가 바로 오늘날 한국이다. 70년전 하지 못한 친일청산을 이제 시작해야 할 때이다.

2015년 7월 16일 목요일

그리스 사태가 주는 교훈

그리스가 결국 EU의 구제금융안을 받아들였다. 그리스는 구제금융을 받는 댓가로 강도높은 경제개혁을 해야만 한다. 구제금융을 받게 되어 그리스 은행들의 도산을 피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리스 민중들이 치러야 할 댓가는 매우 클 것이다. 아테네에서는 구제금융에 반대하는 수만명의 시민들이 화염병을 투척하며 격렬한 시위를 벌이고 있다. 그리스 민중들은 유로존 탈퇴(Grexit)를 원했다. 유로존 탈퇴야말로 그리스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7월5일의 레퍼렌덤(Greferendum)은 그리스로서는 마지막 기회였다. 그러나 치프라스는 신자유주의에 굴복함으로써 그리스 민중들을 배신했고 그리스를 독일의 경제식민지로 전락시켰다. 급진좌파라고 불리우던 시리자(Syriza)도 사마라스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리스인들은 이제 독일 부자들의 시중이나 드는 노비가 될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물론 일부 기득권 세력들은 국부를 독일과 프랑스에 팔아넘긴 댓가로 호의호식할 것이다. 그 가운데는 물론 치프라스도 포함된다. 7월 5일 밤 환희로 넘쳐났던 신타그마 광장은 좌절과 비탄의 장소로 전락했다. 구제금융이란 당장 빵을 살 돈이 없는 사람에게 빵 살 돈을 빌려주는 대신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재산을 나중에 강탈해 가는 것이다. 결국 구제금융을 받은 사람은 폐인이 되거나 전주의 노비가 되는 수 밖에 없다. 그리스 민중들이 고통받는 사이 독일 부자들은 재산을 불려갈 것이다.
그리스 사태가 주는 교훈은 결국 경제는 정치에 종속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는 러시아처럼 디폴트를 선언할만한 정치군사적 힘이 없다. 경제적 주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정치적 주권의 확립이 선행되어야 한다. 14년전 그리스가 유로통화권에 가입했을 때만 해도 그리스는 희망에 부풀었었다. 하지만 그것은 환상이었다. 그리스가 추구하는 인간적인 경제, 민주주의적 경제와 신자유주의는 결코 양립할 수 없었다. 가진자, 힘이 센자가 모든 것을 강탈해가는 경제논리가 바로 신자유주의다. 약자인 그리스는 경제적 부와 함께 정치적 주권마저 빼앗길 상황에 직면했다.

2015년 7월 11일 토요일

브릭스 개발은행(NDB) 공식 출범과 국제금융질서의 변화

브릭스 개발은행(New Developement Bank, NDB)이 공식 출범했다. 러시아 우파에서 열린 제7차 브릭스 정상회담(Ufa 2015 BRICS Summit)에서 브릭스 정상들은 브릭스 개발은행(NDB)의 공식 출범을 승인했다. NDB는 상하이(Shanghai)에 본부를 두며 초대 총재는 인도의 카마트(Kamath)가 임명되었다. NDB는 2015년말에 모든 설립절차를 마무리짓고 내년 4월 이전에 최초의 프로젝트를 시작할 예정이다. NDB는 1000억달러의 초기 자본으로 운용되며 추가로 1000억달러의 커런시풀(currency pool)을 운용할 예정이다. NDB는 향후 운용자금을 기존 1000억달러에서 4000억달러로 증가할 예정이다.
NDB는 중국이 주도하는 아시아개발은행(AIIB)과 함께 비서방이 주도하는 국제개발은행으로 그동안 IMF와 World Bank(WB)가 농단해온 국제금융질서에 큰 변화를 초래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IMF는 구제금융의 조건으로 미국식 신자유주의와 미국중심의 경제헤게모니를 강요하여 제3세계와 비서방 엘리트국가들의 경제를 교란하고 이들국가들의 경제위기를 증폭시키는 주체로 인식되어 왔다. 따라서 NDB는 IMF와 세계은행으로부터 대출받기 어려운 저개발국가들과 제3세계 국가들에게는 새로운 희망이 되고 있다. 신자유주의와 미국의 경제헤게모니를 받아들이지 않고도 않고도 얼마든지 자금을 대출받아 자국의 인프라개발과 경제발전에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브릭스(BRICS)는 중국,러시아,인도,브라질,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이루어진 그룹으로 2009년 러시아 예카테린부르그에서 1차 정상회의를 한 후 매년 정상회담을 개최하고 있다. 브릭스는 2011년에 남아프리카공화국이 가입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브릭스는 당초 고속성장하는 비서방국들의 비공식적인 모임정도로 생각되었으나 이제 세계경제를 주도하는 실체로 거듭 부상하고 있으며 세계경제에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NDB는 브릭스회담의 최초의 결실이 될 것이다.
브릭스는 세계영토의 30%, 세계 인구의 42%, 세계총생산의 30%(PPP기준)을 점유하는 거대한 경제주체다. 한편 그동안 세계경제를 주도해온 G7의 세계경제 GDP비율은 32%이며 앞으로 이 비율은 계속해서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향후 2~3년후면 BRICS의 GDP비율이 G7을 추월할 것이다. G7과 OECD국가들이 경기침체로 성장이 정체된 상태에서 브릭스는 세계경제 발전을 견인하는 주체가 되고 있다. 우파 브릭스 정상회담에서 블라디미르 푸틴(Vladimir Putin)은 "브릭스 국가들은 향후 세계경제의 리더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는 세계경제 헤게모니의 중심축은 서방(West)에서 비서방(Non-West)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