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1월 30일 화요일

인도 여행기


1. 인도로 출발 - 어디로든 떠나고 싶었다.

배낭 꾸리기부터 녹녹치 않았다. 출발 전주에 마트에서 3만 8천원짜리 35L 싸구려 배낭을 사 두었는데, 출발 전날 짐을 쑤셔 넣다가, 그만 지퍼가 터지고 말았다. 여행 초보임이 여실히 드러났다. 출발 당일 아침 9시에 등산용품점에서 15만 5천원짜리 40L 배낭을 사서 부리나케 30분만에 짐을 꾸려서 10시 10분에 집을 나왔다. 집을 나서면서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너무 오래 휴가를 쓰는 것은 아닌지, 함께 여행할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도 궁금했다. 인천 공항까지는 새로 개통된 공항철도를 타고 갔다. 11시에 인천 공항 K  카운터에 도착했다. 혹시 일행이 와 있지 않나 하고 기웃거려 보았지만, 일행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새로운 만남에 가슴도 두근거리고 해서, 커피 샵에서 에스프레소 커피를 한잔 사 마셨다.



잠시 후에 여행사 직원과 이번 인도 배낭여행을 함께 떠날 일행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성인들의 경우 대부부 연세가 어느정도 있어 보였고, 또한 가족단위로 오신 분들이 대부분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홀로 온 사람들은 여자 두명과 나를 포함한 남자 셋이었다. 여자들은 모두 나보다 나이가 많았고, 남자들은 나보다 한두살 어린 동년배 들이었다. 출국 심사를 마치고 탑승구 안에서 함께 여행할 솔로팀의 멤버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모두들 이런 저런 사유로 인도에 갈 이유가 있었다. 이렇게 동행으로 만나게 된 것도 인연이었다. 아시아나 비행기에 탑승하고 나서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리고 있을 때 핸드폰으로 전화가 왔다. 누나로부터 온 전화였는데, 잘 다녀 오란다. 가족들이나, 회사 동료들에게 인도에 갔다 오겠다고 얘기는 했지만 더러는 걱정도 하고, 또한 회사에서는 장기간 휴가로 인한 공백 때문인지 탐탁치 않게 여기는 분위기였다. 그래도, 내 생각은 단호했다. 1년전부터 계획했던 인도여행이었고, 중간에 한번 연기도 했었다. 미룰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미루다가는 평생 가지 못할 것만 같았다. 인도 여행의 동기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썩 명쾌한 답은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비행기가 활주로를 벗어날 때, 내가 느낀 감정은 바쁜 일상으로 인해 몸과 마음이 지쳤다는 것이고, 굳이 인도가 아니더라도 어디로든 떠나고 싶었다. 굳이 여행의 이유를 대라면 잃어버린 내 자신을 되찾고 재충전하는 것이었다. 비행기가 하늘로 날아 오를때 마치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한 마음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행복감이 모든 두려움을 날려 보냈다. 지금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포기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결코 두렵지 않았다. 죽음조차도.

파라노이아는 되기 싫었다. 노마드의 삶으로 다시 회귀하고 싶었다.





2. 상해에서 델리로 - Like a Rolling Stone

중간 기착지인 상해 공항에서, 나는 완전히 여행자의 신분이 되었음을 확인했다. 까다로운 중국 입국 절차를 거치면서, 그리고, 공항 대합실의 편의점에서 과자를 사먹으면서, 영어를 사용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오랜만에 사용하는 영어는 무척 어설펐다. 델리까지 우리를 태워줄 에어 인디아 여객기를 타려면 7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그 시간이 그렇게 지루하지 않았다. 인도 여행에 대한 부푼 기대가 비행기를 기다리는 7시간의 대기 시간을 지루하지 않게 해 주었다. 준비해간 MP3로 밥 딜런의 "LIKE A ROLLING STONE"을 들었다. 내 기분을 그대로 표현하는 듯 했다. 집도 절도 없이,여권 한장이 내 모든 정체성을 대변해 주는 나그네 신세가 되었다. 보헤미안으로서 나의 정체성을 재확인 했다.

밤 10시경에 에어 인디아 탑승했다. 인도 비행기를 타고 인도로 가게 되어서 본격적인 인도 여행의 시작이었다. 이미 비행기 안에서 많은 인도인들을 보면서 벌써 인도에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여승무원들이 아줌마들이고 나이가 많은 것을 제외하면 기내식도 먹을 만 했고 서비스도 그럭저럭 괜챦은 편이었다. 김영미 선생님은 비행기 안에서부터 음식 때문에 트러블이 있으셨다고 한다.



드디어 델리의 인디라 간디 국제 공항에 도착했다. 새벽 4시쯤. 드디어 인도땅에 발을 딛게 되었다. 인디라 간디 공항은 국제 공항 치고는 너무 협소했다. 이번 배낭여행의 가이드 역할을 하게 될 명재욱 길잡이가 마중나와 있었다. 그동안 개별적으로 이동해 왔던 이번 여행의 동행자들의 모습을 모두 볼 수 있었다. 8인가족, 5인 가족, 4인 가족, 3인가족, 2인가족, 솔로 5명에 가이드 1명. 자이푸르까지 직행버스로 이동하였다. 차창밖으로는 벌써 상상을 훨씬 넘어선 인도의 모습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소와 낙타가 보였고, 재래 시장과 낡은 주택들이 마치 옛 기록영화나 사진에서 보는 우리나라 5, 60년대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도로사정은 열악했다. 차로도 좁았고, 포장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곳이 많았다. 그리고, 도로에는 대형 트럭들이 많았다. 버스 운전사의 운전 솜씨는 묘기를 방불케 했다. 사납게 크락숀을 울려가면서, 트럭을 추월하는 모습은 다소 아찔했다. 중간에 허름한 휴게소에서 빵을 샀다. 우유와 설탕을 넣어서 만든 것인데, 무척 달았서, 많이는 먹을 수가 없었다.



3. 자이푸르(라자스탄) - 인도와의 첫 만남

자이푸르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자 오줌 지린내가 진동했다. 버스 터미널에서 우리를 처음 맞이한 것은 거지들이었다. 한 거지 여인이 보시(박시시)하라고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그러나 동전이 없었다. 그렇다고 지폐를 줄 수도 없었다. 처음으로 오토 릭샤라는 것을 탔다. 오토 릭샤는 삼륜차로 핸들이 없고, 운전수는 오토바이처럼 운전을 하고, 승객은 뒷좌석에 타게 되어 있다. 사이클 릭샤와 함께 인도에서 가장 대중적인 운송수단이다. 좁은 릭샤에 5명이 간신히 올라탄 상태로 엠파이어 리젠시 호텔까지 가면서, 인도에 온 기분을 만끽했다. 오토릭샤를 타고, 주변에 펼쳐지는 이국적인 풍경들을 보면서 여기가 인도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호텔에 짐을 푼 뒤, 호텔 식당에서 점심으로 치킨 비리아니라는 음식을 시켜 먹었다. 밥은 안남미처럼 찰기가 없고 푸석푸석해서 뭉쳐지지 않았고, 커리는 향신료를 많이 써서 맵고 자극적이었다. 그러나, 배가 고파서인지 그럭저럭 먹을 수 있었다. 솔로팀 5명은 다시 릭샤를 타고, 핑크시티, 하와마할, 시티 팰리스를 구경했다. 호텔에서 시티 팰리스로 릭샤를 타고 가면서  보았던 광경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도로는 인도와 차도의 구분이 없없고, 가로수도 거의 없었다. 띄엄띄엄 가로수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나이가 많을 것 같은 나무들만 눈에 띌 뿐이었다. 매연은 지독했다. 차선 구분도 없이, 오토릭샤, 사이클 릭샤, 자동차가 무질서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신호등은 없었고, 서로 앞서가겠다고 크락숀을 울려 댔다. 그 가운데 사람과 소, 낙타가 뒤섞여서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역시 백문이 불여일견이었다.눈으로 본 인도의 모습은 책에서 읽었던 것과, 머릿 속에 그려왔던 모습보다 훨씬 더 리얼했다.





시내 투어를 마치고, 다시 오토 릭샤를 타고 암베르 포트로 향했다. 암베르 포트는 18세기 말에 지어진 성으로 규모가 매우 웅장하다. 성의 규모가 워낙 커서 코끼리를 타고 투어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산의 능선을 따라서 성곽이 이어져 있었고, 사암으로 지어져서인지, 황토색의 성채가 마치 영화에 나오는 요새를 연상시켰다. 암베르 포트 투어를 마치고, 다시 자이푸르 시내로 돌아 왔다. 자이푸르 시내의 라즈 만디르라는 극장옆에 있는 라자스탄 전통 음식점에서 저녁으로 인도 요리를 먹었다. 탄두리 치킨과 인도 카레를 먹었는데, 역시 인도 음식 답게 맵고 향이 무척 강했다. 식사를 마치고 호텔로 갈 때는 사이클 릭샤를 타 보았다. 가장 인도다운 운송 수단인 사이클 릭샤를 타보자고 내가 제안을 했는데, 일행 모두 흔쾌히 ok를 했다. 그러나, 막상 뒷자석에 앉아 보니 마음이 불편했다. 다른 사람들도 그랬다고 한다. 제발 가는 도중에 오르막길이나 없었으며 하고 바랐지만, 다소 경사진 곳을 갈 때는 릭샤꾼이 힘이 드는지 내려서 끌고 갔다. 뒷자리에 2,3사람을 태우고 자신의 두 다리 힘만으로 먹고 사는 릭샤꾼들이 측은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의 생계수단인 점을 감안하면, 감상적인 생각만은 할 수 없었다. 첫날부터 강행군을 해서 호텔방에서 씻자마자 바로 곯아 떨어졌다.



4. 타지마할 - 인도 미학의 극치인가 아니면 어느 건축 중독증 환자의 광기인가?

6시까지 자이푸르 역까지 가야 했다. 새벽 5시에 모닝콜이 울렸다. 아마도 부지런하신 여성팀에서 전화를 한 것 같다. 릭샤를 타고 자이푸르 역에 도착해서 아그라행 7시 출발 열차를 기다려야 했다. 이번 인도 여행팀의 가장 큰 원성을 산 것은 아마도 3,4시간 지연되는 열차일 것이다. 7시 출발 열차가 10시에야 도착하는 것이었다. 길잡이는 기상 이변과 안개 때문이라고 설명 하는데, 우리나라 같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기차 지연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 상황을 보며 역시 여기는 인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체념하면서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기다리는 시간 동안 인도 기차역의 풍경도 감상할 수 있었고, 일행과 얘기도 나누다 보니, 3시간이 그렇게 지루하지만은 않았다. 아그라행 열차 안에서 바라본 인도는 또 광경을 보여 주었다. 끝없이 펼쳐진 평야에 채소가 자라고 있었고, 노란 꽃(유채꽃이 아닌가 했는데, 물어 보니 기름을 짜는 용도로 쓰는 식물이라고 한다)이 유독 많이 보였다. 우리나라는 지금이 농한기라 쓸쓸한 논 풍경밖에 볼 수 없을 텐데, 역시 더운 나라라서 그런지 겨울에도 농산물 재배가 가능한 것 같았다. 기차 여행을 하면서 일행들끼리도 많이 친해졌다. 3,6,9 놀이도 하고, 짬짬이 수면도 취하면서 인도에서의 첫 기차 여행을 하였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아그라 역에 거의 다 와서 기차가 1시간 가량 정차해 있는 것이었다. 15시 쯤 되었는데, 열차 지연이 길어지면 오늘 안에 타지마할을 보기 어렵게 되었다. 내일 아침 일찍 카주라호로 출발해야 하기 때문에 오늘 안에 반드시 타지마할을 구경해야 했다. 그래서, 가이드가 결단을 내려, 모두 기차에서 내려서 오토릭샤를 타고, 타지마할 남문까지 가기로 했다. 타지마할 남문에 도착하자 한 음식점에 짐을 풀고, 곧바로 타지마할로 갔다. 타지마할의 외국인 입장료는 750루피로 우리나라 돈으로 약 2만원. 인도인들의 입장료가 25루피인 것을 감안하면 외국사람들한테 너무 바가지를 씌우고 있었다. 인도가 타지마할로 먹고 산다는 소문이 있는데, 그 말이 신뢰가 가기까지 했다. 그러나, 건물 전체가 형형색색의 대리석으로 지어진 것을 보았고, 가까이서 본 문양들이 상감기법으로 정교하게 조각된 것을 보고는 절로 감탄이 나왔다. 무굴 제국의 황제인 샤 자한이 사랑하던 왕비가 죽자 무덤으로 지었다는 타지 마할. 1650년경에 약 20여년에 걸쳐 지어졌다고 하는데, 이슬람 건축의 결정체라고 한다. 물론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가까이에서 본 타지 마할은 매우 웅장했고, 신비스러웠다. 그러나, 타지마할에 대해서는 또 다른 견해도 있다. 샤 자한이 왕비를 위해서 순수한 마음으로 어마어마한 무덤을 지었다고는 하지만, 원래가 건축 중독증 환자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황제 재임 시절 대규모 건축 사업을 많이 벌였던 인물이었고, 그로 인해 국가 재정을 낭비하고 국민들을 착취한 측면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샤 자한의 말년은 좋지 못했다. 자신의 아들에 의해 폐위 되어, 아그라 성에 갇혀 타지마할을 바라보며 생을 마쳤다고 한다.


타지마할을 구경하고 오토릭샤를 한대 대절해서, 아그라 포트를 구경하고, 쇼핑을 했다. 아그라 포트는 입장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입구에서 사진만 찍었다. 다시 오토릭샤를 타고 기념품 가게로 가서 숄을 하나 구입했다. 여행 도중에 목과 얼굴을 감쌀 목도리 용도로 구입했다. 38달러에 구입했는데, 점원이 다소 음흉한 미소를 짓는 것으로 보아 턱없이 바가지를 뒤집어 쓴 것 같았다. 시장에서 내일 기차여행에서 먹을 간식으로 과일과 계란을 사고 나서, 한국 음식점에서 식사를 했다. 한국 음식점이라고는 하지만, 인도 현지인이 한국인으로부터 조리법을 배워서 운영하는 것이다. 오므라이스와 불고기 덮밥을 시켜 먹었는데, 어설프게 맛을 흉내낸 것이기는 해도 그럭저럭 먹을 만 했다. 서빙하는 인도 청년의 "김치 공짜"라는 한국말에 모두 웃고 말았다.



5. 아그라에서 카주라호로 - 아름다운 인도인들

오늘은 하루 종일 이동하는 날이다. 아그라역에서 10시출발 잔시행 열차를 타기로 되어 있었다. 아침 9시쯤에 아그라 칸트역에 도착했다. 그러나, 기차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12시에야 아그라역에 도착하였다. 기차안에서 과일과 계란을 다른 가족 일행과 나눠 먹으면서, 일행들과 더욱 친해질 수 있었다. 심심하면 3,6,9 게임도 하고 준비해간 가이드북을 읽으면서 무료함을 달랬다. 기차밖 풍경도 이제 낮설지 않고, 서서히 장시간 기차 여행이 무료해지기 시작했다. 저녁 6시에 잔시역에 도착했다. 카주라호는 기차역이 없어서 지프를 타고 들어가야 했다. 내가 탄 지프를 운전한 인도 청년이 참 순수하고 성실해 보였다. 카리스라는 이름의 이ㅣ 청년은 나이는 25세로, 신혼이라고 한다. 운전 중 핸드폰에 저장된 아내의 사진을 보여 주기도 했다. 이동 도중에 폭우가 쏟아져서 지프 지붕에 묶여 있는 배낭에 커버를 씌워야 했는데, 비를 맞아서, 옷이 다 젖어가며 배낭 커버를 하나하나 꼼꼼히 씌워주는 모습을 보고 인도인에 대해서 좋은 인상을 갖게 되었다. 차 안에서 이런 저런 많은 얘기를 나누다 보니 꽤 친해져서, 카주라호에 도착해서는 같이 사진도 찍었다. 그에게 진심으로 고맙다고 했더니, 그가 "아유해피"라고 하는 것이다. 내가 그렇다고 하니까, 마치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면서, 나를 포옹했다. 인도인들은 행복의 기준이 내가 아닌 타인인 것 같았다. 타인의 행복이 나의 행복으로 판단한다. 경쟁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남을 누르고 내가 이겼을 때 행복하다고 생각 한다. 다른 사람이 행복한지 안한지 생각할 겨를도 없다. 그저 나만 행복하면 될 뿐. 하지만, 인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인도는 역시 공동체 정신, 종교적인 정신이 살아있는 나라였다. 밤 10시에 카주라호의 숙소에 도착해서 '전라도 밥집'이라는 식당에서 신라면에 공기밥을 시켜 먹고 취침했다. 물론 이름만 전라도 밥집이고 인도인이 운영 하는 식당이었다. 맛은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한국관광객을 겨냥한 어설픈 한국음식보다는 차라리 인도 음식을 먹는 편이 다 좋다. 카주라호에서 우리가 묵었던 숙소는 'HOTEL ZEN' 인데 이름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다. 역시나 카운터에는 오쇼 라즈니쉬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가이드북에는, 라즈니쉬의 제자가 운영하는 숙소하고 적혀 있는데, 주인은 터번을 두르고 수염을 기른 매우 인자하고 너그러워 보이는 전형적인 인부인이었다. 손님들이 들어가고 나갈때 항상 손을 흔들며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데, 그 따뜻한 눈길을 보는 것 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말은 해보지 않았지만, 라즈니쉬의 제자답게 많은 명상수련을 한 것 같았다.






6. 카주라호 - 억압된 성의 해방을 통한 해탈

아침 7시에 기상해서 호텔 정원을 구경하고, 테라스에서 일행과 함께 아침을 주문해서 먹었다. 짜파티와 달, 인도 요구르트를 먹었는데 맛있었다. 호텔 카운터에서 일을 보는 노 급사가 있었는데, 아주 친절하게 카주라호 구경하는 방법을 설명해 주었다. 사장과 종업원 모두 친절한 호텔로, 이번 여행에서 가장 인상이 좋은 호텔이었다. 첵크 아웃을 하고 로비에 쇠사슬로 배낭을 서로 묶어 두고 유유히 카주라호 투어를 시작했다. 자이푸르와 아그라에서는  시간에 쫓겨가며 주마간산식으로 구경을 했는데, 카주라호 투어는 9시까지 호텔 로비에 집결이라 시간이 충분했다. 모처럼, 여유있게 관광을 할 수 있었다. 사원군이 밀집되어 있는 서부 사원군을 시작으로 카주라호 투어를 시작했다. 미투나라고 부르는 남녀 교합상으로 유명한 카주라호의 힌두 사원을 구경하면서 그 의미에 대해서 서로 의견을 교환하기도 했다. 나는 사원이 지어졌던 당시에 유행했던 탄트리즘의 영향 때문이며, 신과의 합일을 육체적 쾌락의 극치로 묘사한 것일 뿐이고, 궁극적인 해탈을 이루는 하나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의미를 떠나서 10세기경에 지어진 힌두사원의 정교한 조각상들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서부사원군을 구경하고 나서, 가이드북에서 찾은 아그라왈이라는 식당에서 인도 음식으로 점심을 먹었다. 인도 사람처럼 맨손으로 한번 밥을 먹어 보고 싶어서, 수저 없이 손으로 밥을 카레에 비벼 먹어 보았는데, 밥이 푸석푸석해서 먹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푸짐하게 제대로 된 인도 정식을 먹을 수 있었다. 호객꾼으로 보이는 디즈와라는 청년이 중간에 따라 붙었는데, 아마도 여행객들을 가게나 릭샤꾼에게 소개해 주고 커미션을 받는 것으로 보였다. 식당앞에서 인상 좋게 보이는 오토릭사 운전수와 흥정을 하여, 남은 카주라호 투어를 그가 모는 오토릭샤로 하기로 하였다. 오후에는 릭샤 운전수와 디즈와를 가이드로 해서 라네 폭포라는 절경을 구경하고, 남부와 동부 템플을 마저 구경했다. 그리고 올드 빌리지라는 인도의 옛 마을을 구경했다. 저녁에는 인도 전통 포크 댄스와 마샬 아츠를 관람했다. 흥미로운 것은 공연에 참가한 남자단원들 중 5명이 이 마을의 오토릭샤꾼이라는 사실이다. 부업으로 공연까지 하는 모양인데, 우리의 오토 릭샤 운전수도  기수로 참가한 점이 흥미로웠다. 카주라호 여행은 이렇게 즐겁게 끝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인도에서 처음으로 불쾌한 경험을 하고야 말았다. 카메라 밧데리가 떨어져서 충전기를 사려고 전자제품 가게에 들렀는데, 그만 가게 주인과 언성이 높아지고 기분이 상하고 말았다. 주인은 처음에는 충전만 시켜주는 것처럼 얘기를 해서 충전만 해달라고 했더니, 충전기를 아예 사라고 하는 것이었다. 다급한 사람을 유도해서 물건을 팔려는 그들의 속셈에 나는 화가 났다. 인도 여행에서 부정적인 기억으로 남는 것은 지나친 호객행위와 바가지였다. 기념품을 사려는 한국인 관광객들에게는 일단 높은 가격을 부른다. 그래서 흥정이 꼭 필요하다. 우리 일행도 선물로 숄을 사기 위해서 상점에서 주인과 30여분간 흥정을 하였다. 하지만, 그렇게 30분간 흥정을 하고 나면 일단 진이 빠지고, 설사 물건을 싸게 사도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다. 릭샤 값 10루피를 깍기 위해서 얼굴을 붉힌 적도 있었는데, 그래 봤자 300원이다. 더구나 인도 물가는 싸기 때문에 바가지를 써 봤자 500원 1000원 손해 보는 것 가지고, 기분이 상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충전기도 200루피(6천원)밖에 안하는데, 굳이 화를 낼 필요가 있었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지금 생각해 보니 후회가 된다.





7. 바라나시행 지옥 열차 - 행복은 가까이 있다.

평생에 그런 경험은 한 번 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인도에서 처음으로 야간 열차를 이용하는 날이다. 9시 30분에 호텔에서 지프를 타고 마호바역까지 빠른 속도로 가서 11시에 도착했다.  그런데, 갑자기 배가 살살 아프더니, 화장실에 가고 싶었다. 그런데, 화장실을 찾을 수가 없었다.(대합실 안에 있는데 아주 지저분했다고 함) 그래서, 역 바로 옆의 주택가 으슥한 곳에서 일을 보고 말았다. 그것도 두번씩이나. 인도의 기차역은 정말 더러웠다. 철로는 거의 쓰레기장을 방불케 했고, 플랫폼에는 소와 개가 활보하고 다녔다. 개가 플랫폼에서 똥을 싸는 모습을 보고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벤치도 아닌 바닥에 담요를 깔고 누워 있었다. 역시 인도니까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힌두교 축제 기간이라 승객이 갑자기 많아져서 티켓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반(인도의 밤열차는 좌석이 취침을 할 수 있도록 접을 수 있는 선반 구조로 되어 있다) 하나에 세사람이 타고 가야 된다고 가이드가 말했다. 3시간이나 더 기다리고 있던 터라 어떻게 해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런데, 기차가 도착해서 승차를 하려고 하니까, 올라타기조차 힘들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다. 사람들을 밀치면서 가까스로 올라 타기는 했는데, 우리자리까지 가기 위해, 통로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거의 밟다 시피해서 가야 했다. 그러나, 우리 자리가 3층 선반의 2층과 꼭대기 층이라, 나는 맨 꼭대기 선반에 올라가서 앉아야 했다. 선반에서 기차 지붕까지 공간이 너무 좁아서 허리를 펼 수도 없었다. 다행히 앞에 선풍기가 있어서 머리를 기댈 수는 있었다. 신발도 벗어서 선풍기에 올려 놓았다. 옆의 이병찬씨는 앞의 선반에 다리를 걸치고서 아주 불편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이런 자세로는 바라나시까지 10시간을 도저히 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다행히 중간에 사람들이 많이 내릴 거라고 한다. 여행이 아니라 고행이라는 우스개 소리가 절로 나왔다. 사람들이 통로를 꽉꽉 매우고 있어서 화장실도 못 갈 것 같았다. 다행히 서너시간 지나니까, 사람들이 조금씩 빠지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한 선반에 두명이 다리를 쭉 뻗고 누울 수 있었는데, 그것만으로도 행복이었다. 선반에 엎드려, 통로를 내려다 보았다. 화려한 색상의 사리를 두른 인도 여인 세명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들은 통로에 눕기도 하고 앉기도 하면서 묵묵히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 중 한명과 눈이 마주쳤는데, 처음엔 눈빛이 아름다워서 나도 쳐다봤는데, 계속해서 뚫어지게 쳐다보는 통에 다소 무안해 졌다. 인도사람들은 사람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우리로서는 다소 적응하기 어렵다.





알라하바드를 지나면서부터 기차는거의 텅텅 비다시피해서 한 선반에 다리를 쭉 뻗고 편하게 누울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의 지옥 열차 체험은 끝나가고 있었다. 열차 여행이 아니라 극기 훈련 또는 인내력 훈련을 한 것 같았다. 오후 5시 조금 넘어 바라나시 역에 도착했다. 오토릭샤를 타고 곧바로 호텔로 가서 짐을 풀고, 호텔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식사후에 갠지스강변의 가트를 구경했다. 어둠 때문에 갠지스강을 뚜렷하게 볼 수는 없었지만, 가장 인도다운 도시이자 이번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에 도착하여 무척 설레고 흥분되었다. 호텔로 돌아와서, 방에서 TV를 틀어 보니 종교관련 프로그램들이 많았다. 역시 종교의 도시 바라나시다웠다. 호텔은 지금까지 묵었더 숙소들보다 시설은 좋은 것 같았는데,  유일하게 온수가 나오지 않는 호텔이었다. 카운터에 얘기했더니. 양동이에 온수를 갖다 주겠다고 했다. 정말 얼마 지나지 않아, 급사가 양동이에 하나 가득 더운물을 날라 왔다.



8. 바라나시 - 죽음을 찬미하는 도시

인도를 다 구경해도 바라나시를 구경하지 않으면 인도는 전혀 본 것이 아니라고 할 정도로 바라나시는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이자, 힌두교의 성지며, 인도의 정신적인 문화를 느낄 수 있는 가장 인도다운 도시이다. 아침 일찍 간단히 요기를 하고, 곧바로 오토릭샤를 타고 사르나트로 갔다. 이제는 릭샤값 흥정하는데도 익숙해져서 저렴한 가격에 사르나트 투어를 할 수 있었다. 사르나트는 바라나시에서 오토릭샤로 약 15분 정도면 갈 수 있는 곳으로, 석존께서 득도하신 후 최초 설법을 하신 곳이다. 때문에, 룸비니, 쿠시나가르, 보드가야와 함께 불교 4대 성지 중 하나이다. 4성제와 팔정도의 설법이 행해졌던 바로 이곳이다. 사르나트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순례를 온 티벳인들이었다. 사르나트의 대표적 유적지는 다메섹 스투파(탑)인데 티벳 순례객들은 탑 주위에서 독경을 하거나 탑돌이를 하면서 또는 절을 하면서 깊은 불심을 보여 주었다. 우리 일행도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탑돌이를 하였다. 다메섹 스투파를 본 후에, 자이나교 사원과, 마하보디 사원, 고고학 박물관을 차례로 구경하고 점심은 티벳 식당에서 했다. 가이드북에 나와있는 프렌즈 코너즈 레스토람이라는 작은 식당인데, 티벳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곳이라 낙점되었다. 주인은 젋고 아주 쾌활한 티벳인이었다. 우리가 시켜 먹은 뚝빠는 우리나라의 막국수와 비슷한데, 인도에서 먹은 음식 가운데 우리 입맛에 가장 맞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인들에게 가장 인기있다는 모모(만두)는 먹어 보지 못했다.
 

오후에는 갠지스강과 가트를 구경하였다. 고도리아에서 사이클 릭샤를 타고 마니까르니까 가트(화장터)에서부터 가트 투어를 시작하려고 하였으나, 그만 릭샤꾼이 미로길에 내려주는 바람에 다시 고도리아(큰 사거리)로 나오고 말았다. 바라나시의 미로길은 한번 들어가면 나오기 어렵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꾸불꾸불 방향을 종잡을 수 없는 미로길을 묻고 물어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미로를 빠져나와 들어선 대로는 바로 사이클 릭샤를 탔던 고도리아 거리였다. 한시간동안 제자리걸음을 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다샤스와메트 가트(메인 가트)까지 걸어간 후 보트를 타고 버닝 가트까지 갔다. 보트에서 바라본 가트의 풍경은 장관이었다. 가트는 갠지스강에서 목욕하려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가트의 종교적인 분위기가 만들어 내는 아우라는 엄청났다. 의식이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버닝 가트에 도착해서 시신이 태워지는 모습을 직접 보게 되었다.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인도 사람들은 갠지스강의 화장터에서 시체를 화장해서 그 재를 갠지스강에 뿌리면, 생전의 모든 죄업이 소멸된다는 믿음이 있다고 한다. 또한 화장은 힌두교도들의 염원인 신과의 합일의 과정이기도 하다. 죽음은 유한한 존재인 인간으로서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죽음을 통해서 개체적 존재인 아트만은 육체의 옷을 벗고 우주적 실재인 브라흐만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인간이 신이 되는 성스러운 순간이다. 마니까르니까 가트에서 365일 24시간 쉬지않고 시체를 태우는 데에는 신과의 합일을 향한 힌두교도들의 간절한 갈망이 있기 때문이다.







보트 투어를 마치고, 가트를 거닐면서 갠지스 강을 구경했다. 막 목욕을 끝내고, 옷을 갈아입는 여인들, 얼굴에 하얀 분칠한 사두, 물에서 장난치면서 목욕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갠지스강에서 목욕을 하며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있었다. 강가로 내려가 갠지스 강 물을 손으로 떠서 공중에 뿌려보기도 했다. 디아(꽃접시)를 파는 소녀에게서 꽃접시를 하나 사서 불을 붙여 갠지스강에 띄웠다. 가트를 거닐고 있노라니, 일단의 인도인들이 내게 블레싱을 받으라고 말을 건넨다. 이마에 빈디(빨간 점)를 찍어주고 만트라를 외우게 했는데, 댓가로 10루피를 내니까, 더 내라는 눈치라서 50루피를 보시했다. 사실 인도에 온 이유는 갠지스 강을 보기 위해서라고 얘기해도 과언이 아니다. 갠지스강을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내 영혼이 치유될 것만 같았다. 화장터도 구경하고, 꽃접시도 띄우고, 빈디도 찍고, 갠지스강 물도 손에 적셔 보고 이정도면 정화의식으로는 충분할 것 같았다. 아쉬운 점은, 악수를 청하면서 마사지를 해주는 바라나시의 마사지사로부터 마사지를 받을 시간이 없었던 점이었다. 저녁에는 가이드의 인솔로 다시 미로 투어를 했다. 그리고, 보트를 타고 갠지스강의 밤 풍경을 감상했다. 보트 위에서 메인가트에서 행해지는 푸자를 구경하고 있노라니, 일단의 소년들이 디아를 팔기 위해 보트에 올라왔다. 디아를 하나 사서 불을 붙여 갠지스강에 띄웠는데, 밤에 띄운 꽃접시는 더 아름답게 보였다. 보트투어를 마치고, 라가카페에 들러 김밥을 샀고, 저녁은 고도리아의 한 분식점에서 짜이와 카레 튀김으로 해결했다. 호텔에 집결해서, 오토 릭샤를 타고 무갈 사라이 역으로 갔다. 야간열차를 타고 델리로 이동한다.





9. 델리로 가는 기차에서 - 인도에서 체념하는 법을 배우다.

가장 지루한 여행이었다. 앞서 탄 열차들보다는 등급이 높았지만, 그래도 사고에 의한 지연은 어쩔수 없었다. 새벽 1시에 승차해서 델리 니자무딘 역에 밤 9시에 도착했다. 예상대로라면 오후 1시쯤에 델리에 도착해서 인도의 수도인 델리를 구경하는 것이었는데,  열차사고에 의한 지연으로 20시간동안 열차 여행을 하게 되었다. 인도에서 배운 철학중에 하나는 체념하는 것이다. 빨리 델리에 도착해서 구경도 하면 좋겠지만, 느긋하게 앉아서 창밖 풍경을 바라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덕분에 마음속으로 이번 여행을 정리할 수도 있었고, 피로에 지친 몸을 쉬게 할 수도 있었다.

밤늦게 뉴델리 역 근처의 파하르간지 거리의호텔에 짐을 풀고 한국식당(한국인이 운영)에서 김치찌개로 식사를 하고, 기념품을 사기 위해 거리 구경을 했다. 인도에서의 마지막 식사이기도 하고, 일행 모두가 한자리에서 식사를 한 흔치 않은 경우라서, 각자 여행 소감을 듣는 시간을 가졌으면 싶었는데, 자정 가까운 시간이라 모두들 그냥 숙소로 돌아갔다.





10. 델리 공항에서 - 인도와의 아쉬운 작별

부지런하신 이은희 선생님께서 모닝콜을 주셔서 산책 겸 간단한 아침식사를 하자고 제안하셨다. 우유와 샌드위치 그리고 차이로 아침끼니를 떼우고, 호텔 로비에 집결했다. 빡빡한 여행 일정 때문에 힘들기도 했지만, 헤어지는 시간이 찾아오니 아쉬웠다. 12시 출발 상해행 에어 인디아를 타기 위해 명재욱 길잡이와 작별 인사를 하고 택시를 타고 델리공항으로 갔다. 그런데, 뭄바이에서 도착 예정인 비행기가 지연되는 바람에 항공사에서 마련해준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다. 열차 지연도 모자라서, 비행기까지 지연이라니. 설레는 마음, 즐거웠던 순간들이 모두 지나고 이제는 헤어짐의 아쉬운 순간이 찾아왔다. 에어 인디아는 17시 30분에 이륙해서 6시간만에 상해에 도착했다. 인천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또다시 8시간을 지루하게 기다려야 했다. 인도로 떠나는 날 상해공항에서 기다렸던 7시간은 지루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지루했다. 그리고, 점점 속이 불편해져 왔다.





11. 인천 공항 도착 - 인도는 내 마음속에 있다



8시 30분 상해발 아시아나 비행기를 타고 11시에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그동안 함께 여행한 분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각자 집으로 돌아 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물설사 증세가 찾아왔다. 떠나기 전 약국에서 구입해서 배낭에 넣어 두었던 설사약을 먹었는데 듣지를 않았다. 기운이 빠지고 앉아 있기도 힘들 정도였다. 다음날 아침까지 끙끙 앓다가 결국 휴가를 내고 말았다. 병원에 가서 의사의 진료를 받고 주사 맞고 약을 먹고 나니 증세가 호전되었다.


오쇼 라즈니쉬는 이렇게 말했다. "인도는 지명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성지이다" 인도는 내 마음속에 있었다. 단지 그것을 깨닫지 못했을 뿐. 9일간 보았던 인도는 내 마음의 투영이었을 뿐이다. 내게 인도는 착하고 순진한 어린아이와 같았다. 열흘 간의 인도 여행을 통해서 나는 내 마음속 구석진 곳에 버려진 인도를 다시 되살리고 싶었다.

2010년 11월 13일 토요일

하늘 공원 탐방


길동 자연 생태공원을 탐방하고 지하철 5,6호선을 타고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으로 향했다. 난지도 쓰레기 매립장 위에 만들어진 하늘 공원을 탐방하기 위해서였다. 무인 자전거 대여기가 있어서 휴대폰 인증으로 자전거를 빌릴 수 있는데, 2시간 대여에 150원으로 공짜나 마찬가지다. 원래는 자전거를 타고 둘러보려고 했는데, 하늘공원으로 올라가는 목책계단을 보자 그냥 주변 조깅코스를 한바퀴 돈 다음에 자전거를 반납하고 다시 걸어서 하늘공원을 올라갔다.







 난지도는 원래 서울에서 배출된 쓰레기를 매립하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김포와 부천에 매립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드넓은 공원에는 억새와 띠밖에 없었다. 이곳 하늘 공원은 쓰레기 위에 거대한 철판을 얺고 그 위에 흙을 쌓아서 만든 곳이다. 비가 와도 물이 땅속에 저장되지 않고 빠져 버려서 땅은 항상 건조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건조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억새를 심을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드넓은 벌판에 하얀 억새가 만들어내는 풍경은 도심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진귀한 풍경이다.

길동 자연 생태 공원 탐방

강동구 길동에 있는 자연 생태 공원을 찾았다. 길동 자연 생태 공원은 서울에 있는 다른 공원들과는 달리 인공적인 조경을 배제하고 자연 그대로의 상태로 생태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생태공원 도로 맞은 편에는 허브 공원이 있다. 각종 허브를 전시해 놓아서 진한 허브 냄새가 풍겼다. 허브 공원 주위에는 산책코스가 있었는데, 아스팔트길이라 걷기에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그런데, 처음에는 이곳이 생태공원으로 착각하고 실망하여 돌아가려고 했는데, 생태공원은 길 맞은편에 있었다. 




길동 자연 생태 공원은 자연 상태의 습지에 나무로 산책로를 만들어 놓은 것이 특징이다. 서울에서는 유일하게 자연상태 그대로의 공원이라고 한다. 올림픽 공원이나, 서울 숲에 비하면 크기는 작지만 자연 생태계를 훼손하지 않고 보존하였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숲에는 고라니와 너구리와 뱀과 같은 야생동물들이 있다고  적혀 있었지만 보지는 못했다. 대신 습지연못에 사람의 인기척을 들은 청둥오리와 왜가리들이 날아가는 모습은 볼 수 있었다. 

2010년 11월 6일 토요일

소래 습지 생태 공원 탐방

소래포구를 둘러본 뒤에 소래 습지 생태 공원을 찾았다. 소래포구에서 15분 정도 걸으면 습지공원입구가 나온다. 소래습지공원도 블로그를 통해서 알게 되었는데, 인천에 이런 멋진 생태공원이 있었다는 것을 이제껏 모르고 있었다.
 입구에서부터 신비로운 갯골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갯골은 바닷물이 들어오는 통로인데, 간조때라 물이 많이 빠진 상태다.

 습지를 가득 덮고 있는 붉은색의 식물은 칠면초다. 일년에 색깔을 일곱번 바꾼다고해서 칠면초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갯벌에서 많이 서식하는 식물이라고 하는데, 갈대숲을 제외한 습지 공원의 대부분을 덮고 있는 풀은 바로 칠면초다.
습지공원 입구에서 조금 걸어들어가면 염전을 볼 수 있다. 물론 예전의 모습을 복원한 것이다. 소래습지는 한때 우리나라 최고의 소금생산지였다고 한다. 그런데, 산업화가 진행되었던 1970년대부터 소래 염전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염전 바로 옆에는 소래습지 생태공원 전시관이 있다. 소래 습지의 생태적 의미와 역사를 배울수 있는 곳이다. 인천의 습지가 세계 5대 갯벌 중 하나라는 사실을 이곳에서 알게 되었다.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정작 세계는 이곳을 귀중한 생태자원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얼핏보면 삭막해 보이는 갯벌에는 수많은 생물들이 서식하고 있다. 또한, 생태계의 오염을 정화시키는 역할도 하고 있다. 갯벌이야말로 귀중한 생태 자원이다.


   
 습지 한가운데 갈대밭 사이에 풍차 세대가 돌아가고 있었다.  풍차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황량한 들판이 주는 적막감을 약간 감소시켜 주고 있었다. 또한 하늘에서는 엔진이 달린 2대의 패러글라이더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습지의 호수는 세 종류로 구분된다. 염수, 기수, 담수. 염수는 바닷물이고, 기수는 바닷물과 민물이 섞인 것, 담수는 염도가 낮은 육지의 물을 말한다. 소래습지에는 염수, 기수, 담수 3종류의 습지가 모두 있다. 이곳 습지는 먹이들이 풍부해 철새들이 찾아오는 곳으로 조류 관찰데크가 설치되어 있다. 새들이 놀라지 않도록 창문틈 사이로만 새들을 보게 만들어 놓았다.


 염분이 있는 갯벌의 대부분은 붉은색의 칠면초들이 자라고 있었지만 담수호에는 주로 갈대들이 서식하고 있었다.
 습지호수에는 많은 종류의 새들이 있었다. 그러나, 새들은 사람을 경계하는지라 가까이서 사진을 찍기 어려웠다. 호수 한가운데 새들이 쉴 수 있도록 횃대를 설치해 놓았는데, 최대한 줌인해서 찍었는데, 횃대에 앉아 있는 새들은 갈매들이었다.
 소래 갯골은 바닷물이 들어오는 통로인데, 만조때라 서서히 바닷물이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소래 갯벌의 역사는 800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지금은 서서히 육지화 되어가고 있는 갯벌이라고 한다. 또한 이곳에는 멸종 위기의 희귀 식물들도 서식하고 있다.


소래습지공원은 둘레길만 3.1킬로미터로 매우 넓다. 공원 둘레길 뿐만 아니라, 공원 안쪽에도 여러 갈래의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산책로는 모두 흙으로 되어 있어서, 도시인들의 정서 함양에 무척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런데, 토요일인데도 공원을 찾은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소래 습지 생태공원은 자연의 경이로움과 함께 습지 생태를 체험하기에 좋은 곳이다. 갯벌은 바다와 육지의 경계로 많은 생명체들이 서식하는 생태의 보고다. 또한 다양한 생물들이 서로 얽혀서, 유기체와 같이 살아 움직이는 거대한 생명체라고도 할 수 있다. 산업화의 논리로 갯벌의 소중함이 무시되어 왔지만, 이제는 관념이 바뀌어야 한다. 자연이야말로 우리가 지켜야할 가장 소중한 자원이다.

 

소래포구



11월 6일 소래포구를 찾았다. 소래포구는 인천 남동구에 있는 작은 포구로 갯벌과 어시장이 유명하다. 인천 계산동에서 출발하여 간선버스로 이동하였는데 1시간 정도가 소요된 것 같다. 계산동에서 빠르게 가는 방법은 302번 버스를 타고 송내역으로 가서 103번 간선버스로 갈아타는 것이다.  

소래포구 어시장에 도착했는데 안개가 짙게 깔려 있었다. 짙은 안개 때문에 소래포구의 아름다움을 카메라에 제대로 담지 못할까 염려 했었으나, 오히려 안개 때문에 소래포구의 모습이 더욱 서정적으로 보였다. 소래 어시장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수산물을 사고 파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포구는 간조때라 물이 많이 빠져 있었다. 물이 빠지자 고기잡이 어선들이 갯벌위에 떠 있었다. 아마도 저녁때가 되면 다시 물이 차서 배들은 다시 물위에 뜰 것이다.


 소래어시장은 언제나 활기가 넘친다. 바다 냄새 못지않게 사람냄새를 맡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소래포구다. 갯벌에서는 많은 갈매기들이 끼룩끼룩 소리를 내며 열심히 먹이를 찾고 있었다. 갈매기들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먹이감이 많다는 뜻으로  소래포구가 살아있는 생태공간임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