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1일 금요일

문화유산답사-수원 화성


수원 화성에 갔다. 화성은 정조대왕때 만든 성이다. 수원 화성은 방위의 목적외에도 서울을 대신할 신도시  개념으로 축조한 성으로 정조임금이 말년에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고 여생을 보내기 위해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정조임금이 사망하고 정순왕후가 정권을 잡자 화성 신도시 계획은 백지화되고 말았다. 수원 화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성으로 18세기 성 축조방식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문화재이다.


버스를 타고 창룡문에  내렸다. 수원 시민은 공짜로 입장이 가능하지만 일반 관람객의 경우 1000원의 입장료를 내야한다. 성벽길을 따라 산책하는 기분으로 걸으면서 화성과 그 주변 경치를 감상하였다. 화성은 성벽과 둘레의 전각을 제외하면 성 안과 밖이 모두 수원 시가지다.  화성 성벽의 가장 큰 특징은 아랬쪽은 화강암으로 위쪽은 벽돌로 쌓았다는 점이다. 자세히 보면 화강암 돌들이 모두 사이즈가 다른데도 불구하고 레고블럭처럼 가지런하게 쌓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크기가 다른 사각형의 돌들을 쌓다보면 분명 모서리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런 곳은 돌의 모서리를 깍아서 서로 맞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성벽을 따라 걷다보면 팔달문이 나오는데 현재는 보수공사중이다. 팔달문을 지나서 성은 언덕으로 이어진다. 언덕위에서는 수원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계속 걷다보면 장안문이 보인다. 장안문은 숭례문보다 더 큰 문으로 우리나라의 옛날 문 가운데서는 가장 큰 문이라고 한다. 화성 사대문의 특징은 성문 밖에 옹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문의 수비를 더욱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화성을 한바퀴 돌아 다시 창룡문으로 돌아왔다.

2012년 9월 12일 수요일

답사-서대문 형무소


8월 24일 토요일 오전 서대문 형무소에 갔다. 서대문 형무소는 일제 시대와 군사독재 정권 시절 독립운동가들과 정치범들을 수감했던 교도소로 1987년 형무소가 의왕시로 이전한 이후로는 역사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서대문 형무소는 1907년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한 이후 일제가 만든 형무소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던 많은 분들이 이곳에 수감되었으며 또한 많은 분들이 이곳에서 죽어갔다.

역사관에는 일제강점기 때 이곳에 수감되었던 많은 독립운동 지사들의 사진들이 벽에 빼곡히 붙여져 있었다. 3.1운동 당시 체포되어 수감되었던 한용운 선생의 사진도 볼 수 있는데 정면을 향해 노려보는 눈빛이 아주 매섭고 인상적이었다. 또한 유관순 열사의 사진도 볼 수 있었다. 유관순 열사는 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다 옥사 하였다. 일본놈들은 심지어 유관순 열사의 시신을 아주 잔혹하게 훼손하였다고 한다.

일제는 이곳 형무소에서 독립운동가들에게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고문을 자행하였다. 역사관에는 당시 고문의 모습과 고문에 사용했던 기구들을 전시해 놓고 있었다. 한 나라의 주권을 침탈하고 그 국민들을 복종시키기 위해서 그들은 이런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다.
 

이곳에는 일제시대 때 이육사와 함께 수감생활을 했던 이병희 지사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고문 두려워 하면 독립 운동 할 수 없다.” 그들은 잔인한 고문과 비인간적인 수감생활을 할 각오를 하면서 독립운동을 한 것이다.
자신을 희생하면서 독립을 위해 싸운 분들이 있었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일신의 영달을 위해서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은 친일파들도 있었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일제에 의해 착취를 당했지만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들은 작위를 받고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들이 해방후에도 우리 사회의 주류가 되었다는 점이다. 해방 후 친일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친일파들은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 건재해 있다.

넓은 서대문 형무소 한 곳에는 사형 집행장이 있다. 이곳에서 사형수들을 교수형에 처하였다. 사형대에서 죽은 시신은 가족들에게 인계 되었지만 연고자가 없는 경우는 화장터로 보내졌다. 그러나 고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서 시신을 강제로 화장 해버리는 경우도 많았다.

서대문 형무소는 일제시대 뿐만 아니라 유신 시대에도 정치범들을 수용했던 곳이다. 형무소 곳곳에서 당시의 비인간적인 수감 생활을 확인 할 수 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군사독재 정권이 서로 바톤 터치를 했을 뿐 이 곳 형무소에서 잔인한 고문과 인권 탄압은 계속되었다.

2012년 9월 2일 일요일

치욕의 역사를 간직한 창덕궁


창덕궁은 종묘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궁궐로 가장 한국적인 궁전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파괴된 후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기 전까지 창덕궁은 창경궁과 함께 정궁의 역할을 하였다. 정조대왕을 비롯하여 조선 후기의 임금들이 주로 거처 하던 곳이 바로 이 창덕궁이다. 또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거처하던 궁궐이 바로 창덕궁이다. 현재의 창덕궁은 순종 당시의 모습이라고 보면 된다.


창덕궁의 정문은 돈화문이다. 왕궁의 정문은 덕수궁을 제외하고 다 화(化)자 돌림이다. 경복궁은 광화문, 창경궁은 홍화문이다. 입장료는 궁궐 일반 관람이 3000원, 후원까지 관람할 경우 8000원인데, 가격이 꽤 많이 올랐다. 창덕궁 후원은 두 번 구경하였는데 반드시 가이드의 인솔을 받아야 한다. 오늘은 궁궐 관람만 하기로 했다.

돈화문을 지나자 안내방송이 들렸다. 곧 한국어 가이드의 설명을 들을 수 있는 투어가 시작된다고 한다. 가이드를 따라서 정조 때 만들었다는 규장각도 보고 궐내각사를 두루 돌아보았다. 가이드는 안내 책자에 나오지 않는 세밀하고 중요한 내용들 까지도 꼭 집어서 말해 주었다.


창덕국에는 경복궁에 비해 유독 일본인 관광객들이 많다.  왜 유독 창덕궁에 일본인들이 많이 올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그것은 창덕궁이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이 거처하던 곳이라는 사실에서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 같다. 순종은 일제에게 나라를 건네준 인물이다. 그는 아버지 고종에 비해 나라를 지키려는 의지도 없었고 카리스마도 없는 인물이었다. 고종은 을사조약이후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하는등 마지막까지 나라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노력을 했다. 그로 인해 그는 일제에의해 강제로 퇴위를 당했다.

하지만 고종을 이은 순종은 그야말로 이름뿐인 황제였다. 순종은 병약하여 후사도 없었으며 일본이 내려준 이왕이라는 작위로 창덕궁에서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따라서 창덕궁은 일왕이 임명한 왕인 순종이 거처하던 곳으로 일제의 조선 식민지 지배를 상징하는 곳이다. 그리고 창덕궁은 한일 합방 조약이 체결된 곳이다. 창덕궁 대조전이 바로 한일합방 조약이 체결된 곳이다. 이렇듯 창덕궁은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치욕의 장소이지만 일본놈들에게는 조선 식민지 지배와 과거의 영화에 대한 향수가 남아있는 곳이다. 일제 강점기에 창덕궁을 보수할 때 일제는 경복궁의 전각을 허물어 자재를 충당했다. 새로운 자재를 사용하지 않고 궂이 경복궁의 전각을 헐어버린 이유는 경복궁이 조선 왕조의 법궁으로 조선의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이 창덕궁을 많이 찾는 이유를 이제 알 수 있을 것이다.

가이드를 따라서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과 대조전을 구경하였다. 인정전 안에는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는 것이 특이한데 순종은 이곳에서 주로 연회를 열었다고 한다. 대조전은 왕비가 거처하던 곳으로 다른 궁궐들과는 달리 문이 창호가 아닌 유리로 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대조전에는 순종황제와 왕비가 사용하였던 가구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순종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자동차를 타고 다녔던 왕인데 차를 타고 내리기 편하도록 전각을 고친 모습도 볼 수 있다.

가이드를 따라 마지막으로 낙선재를 구경하였다. 낙선재는 영친왕의 비 이방자와 고종황제의 마지막 딸인 덕혜옹주가 생을 마감한 곳이다. 원래 낙선재는 헌종 임금이 자신이 총애하던 후궁을 위해 지어준 전각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