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3일 월요일

한국은 삼성,현대,LG 공화국인가

외국에 나가보면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상당히 긍정적이다. 삼성,현대,LG등 수출기업들이 글로벌 경쟁에서 연일 승승장구하고 있고 한류의 영향으로 유럽과 미국에서는 한국하면 역동적이고 모범적인 자본주의 국가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유럽의 호스텔에서 만난 한 이슬람계 프랑스 청년은 한국이라는 나라는 잘 몰라도 삼성,현대,LG라는 말을 하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최고라고 말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나도 한국 기업들이 해외에서 인정받는데 대해 기분이 좋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삼성,현대,LG가 해외에서 잘나간다고 해서 한국이 모범적인 자본주의 국가라고 말 할 수 있을까. 원래 남의 떡이 커 보인다고 유럽과 미국은 지금 심각한 경제위기를 겪고 있어서 상대적으로 한국이 잘나가는 나라라고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삼성,현대,LG의 성공 이면에는 양극화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또한 삼성,현대,LG가 한국 경제력의 50퍼센트를 장악하고 있는 경제력 편중 현상도 결코 좋은 것이 아니다. 한국 수출 대기업들의 성공 배경에는 종업원들의 과도한 업무스트레스와 하청기업 및 비정규직들에 대한 착취가 있음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생계형 자영업자들의 몰락, 세계 최장근로시간,청년실업 증가,자살률 1위, 출산율 꼴찌,가계부채 급증, 고령화등 한국사회의 문제가 심각한데도 수출재벌만 잘 되면 정말 한국경제가 살아날 수 있을까. 수출재벌들이 거둔 엄청난 이익은 대부분 주식 지분의 50~60퍼센트를 장악하고 있는 외국인 투자자들과 대주주에게 돌아간다. 때문에 삼성,현대,LG가 해외에서 승승장구할 때 대다수 한국인들은 낙수 효과는 커녕 삶이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조중동등 보수언론에서 삼성,현대,LG의 해외시장에서의 선전만이 부각되는 모습이 마치 화장빨로 자신의 추함을 감추려는 추녀의 모습과 비슷하다. 하지만 특정재벌에 편중된 경제구조가 얼마나 오래 지속할 수 있을까. 삼성,현대,LG가 지금은 분전하고 있지만 중국등 신흥국의 추격으로 경쟁력을 상실한다면 한국경제는 어떻게 되겠는가. 경제력이 특정 재벌에 편중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2012년 11월 20일 화요일

베이징(北京) 여행


11월 16일부터 19일까지 3박 4일 일정으로 베이징 여행을 하였다. 이번 여행은 여행사의  패키지 상품을 이용하였다. 패키지는 자유 여행에 비해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없고 쇼핑 센터를 들리는 등 여러 단점이 있지만 저렴한 비용으로 편리하게 여행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베이징 셔우투 공항에 내리자 가이드가 맞이해 주었다. 가이드는 30대 초반의 조선족 남자로 중국어가 매우 유창했다. 우리 일행은 나를 포함해서 모두 14명이었다. 가이드는 버스 안에서 마이크로 중국에 대해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해 주었다. 중국에서 1년 정도 생활한 사람들은 중국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중국에서 10년 정도 생활한 사람들조차 중국은 이해하기 어려운 나라라고 말을 한다. 그 정도로 중국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면이 존재하는 나라다.

베이징 이화원 인공호수 앞에서
가이드의 이야기 중 가슴에 와 닿는 것은 중국에 대한 한국인들의 오해에 관한 부분이었다. 우리는 중국에 대한 이미지가 별로 좋지 않다. 장기매매라든지 중국산은 품질이 떨어진다든지 하는 중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대부분 언론에 의해 과대 포장된 것이다. 긍정적인 것은 말하지 않고 부정적인 것만 크게 과장하는 언론의 속성 때문에 우리는 중국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붓에 물을 묻혀 바닥에 글씨를 쓰는 노인
베이징은 부동산 거품이 매우 심하다고 한다. 가이드의 말을 직접 옮겨 적는다면 믿기지는 않지만 평당 1억원 그러니까 20평짜리 아파트가 20억에 달하는 것도 있다는 것이다. 일인당 국민소득이 잘해야 한국의 2분의 1 수준인 베이징의 아파트가격이 강남 아파트보다 더 비싸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베이징 거리는 고층 건물들의 천국이었다. 베이징의 인구는 2천3백만이고 지금 경제가 한창 좋을 때이다. 소득 수준이 점점 올라가면서  쾌적한 주거에 대한 욕구가 증가하여 아파트 가격 거품이 일고 있는 것 같다. 마치 우리나라의 20년전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차도에는 자동차들이 많았다. 부동산과 마찬가지로 자동차도 한국보다 더 비싸다고 한다. 베이징은 멕시코시티 다음으로 교통정체가 심한 도시라고 한다. 도로는 넓고 잘 형성되어 있으나 늘어나는 자동차를 감당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 이다. 그래서 중국 정부도 최근에는 일정 조건을 만족하는 사람들에게만 자동차를 구입할 수 있는 허가를 내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부동산과 자동차를 제외한 생활 물가는 한국보다 매우 저렴한 편이다.
만리장성을 오르는 사람들

첫날은 798 예술의 거리, 수족관, 베이징 수도박물관을 구경하고 서커스를 관람하였다. 서커스단의 공연은 볼만 했다. 저녁에는 베이징의 쇼핑가인 왕부정 거리를 구경하였다. 둘째날은 이화원과 만리장성을 구경하였다. 이화원의 인공호수는 듣던대로 엄청나게 넓었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간 만리장성은 그야말로 명불허전의 장관이었다. 만리장성을 구경하고 나서 전신 마사지를 받았다. 셋째날은 천안문 광장과 자금성을 구경하였다. 그리고 인력거를 타고 베이징의 전통 주택가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서울의 인사동과 비슷한 십찰해 거리를 구경하였다. 마지막으로 금면왕조를 관람하였다. 금면왕조는 베이징 올림픽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뮤지컬로 장대하고 화려한 무대 퍼포먼스가 일품이었다. 하지만 라텍스가게,진주가게,찻집,한의원등에 들려 꽤 많은 시간을 낭비한 것은 패키지의 단점이라고 할 수 있다.
만리장성에서

가이드는 중국에서 태어났지만 러시아에서 공부를 했고 유창한 중국어를 구사하며 중국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나는 중국이 최근에 고성장을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가이드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중국은 한국사람 2명이 할 일을 열명,스무명이 달라붙어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값싼 노동력을 투입해서 쉽게 생산성을 증가시킬 수 있기  때문에 중국경제가 최근까지 고성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러운 것은 중국의 복지 제도였다. 중국은 60세까지 정년이 보장될 뿐만 아니라 퇴직이후에도 평생 월급의 70퍼센트 수준인 연금을 받는다고 한다. 비용을 줄이기 위해 정리 해고를 일삼고 노후 복지가 최악인 한국과는 대비되는 부분이다. 복지제도가 잘 되어 있다보니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이 없다고 한다. 누가 국가 주석이 되든 자신들의 삶에 큰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다민족 국가인 중국에서 서양식 자유민주주의를 실시한다면 중국은 큰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한다.

천안문 광장에서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중국은 가사일을 대부분 남자가 한다는 것이다. 육아와 요리,빨래,청소등 기본적인 가사일을 모두 남편이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국여자들이 결코 호강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중국의 여성들은 대부분 직장에서 일을 한다. 우리나라 여성들보다 사회참여율이 높다. 그리고 우리나라처럼 남자들이 직장에서 밤늦게 야근하며 혹사당하지도 않는다.  대부분 부부가 함께 직장생활을 하고 일찍 퇴근하기 때문에 출산을 하는 여자를 대신해 가사일을 남편이 하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중국남자들은 한국남자들처럼 병역의 의무도 없다.
자금성 태화전 앞에서

베이징 십찰해 거리
중국에는 흑호구라는 것이 있다. 가이드로부터 처음 들은 말이다. 중국은 인구가 워낙 많아서 산아제한 정책을 쓰고 있다. 한 가정당 아이는 한 명만 낳을 수 있다. 그 이상 낳을 경우 꽤 높은 세금을 내야 한다. 그런데 중국은 남아 선호 사상이 남아 있어서 아들을 낳을 때까지 자식을 낳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그런데 호구에는 자식들 중 가장 똑똑한 아이를 올리고 다른 자식들은 호구에서 제외한다. 이렇게 호구에서 제외된 사람들을 흑호구라고 부른다. 흑호구는 교육이나 사회활동에서 많은 제약이 따르기 때문에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하기 어렵다. 그래서 중국 정부는 흑호구들이 평생 먹고 살 수 있도록 이들에게 서커스나 마사지등의 기술을 가르치고 있다. 이번 여행에서 현란한 묘기를 보여준 서커스단원들과 마사지샵에서 마사지를 해준 사람들은 흑호구들이다.


공원에서 사교댄스를 추는 베이징 시민들
가이드는 조선족에 대해서 언급했다. 조선족이라는 말은 상당히 어감이 좋지 않다. 중국인도, 이북사람도 한국사람도 아닌 정체성이 모호한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족은 백년전만 해도 같은 땅에서 살던 같은 한민족이다. 일제 강점기때 독립운동이나 경제사정등의 이유로 만주로 이동한 사람들이 현재 중국의 조선족이다. 가이드는 조선족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져줄 것을 당부했다. 그리고 조선족 친척이 있는 경우에는 꼭 초청장을 보내주라는 당부까지 하였다. 한국에는 많은 조선족들이 들어와 있다. 한국남자와 결혼한 조선족 여인이 많아서 현재 조선족 남자들은 결혼을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조선족 여인과 한국남자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한국 국적을 부여하기 때문에 조선족 여인들이 결혼을 통한 이주를 최근에 많이 하고 있다. 한국인 단체 관광객들을 이끌고 다니는 가이드들은 모두 조선족들이다.
호텔룸에서 바라본 베이징 아파트 단지의 모습
3박4일 동안 베이징을 둘러보았다. 장대한 스케일의 고궁과 우후죽순처럼 솟은 빌딩들이 베이징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북경의 오리고기는 역시 맛이 일품이었고, 왕부정 거리에서 맛본 전갈 꼬치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될 것 같다. 한국에서는 백만원을 줘도 보기 힘든 ‘금면왕조’ 공연과 아슬아슬한 베이징 서커스단의 공연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여행을 함께 했던  분들과 마지막 밤 맥주를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던 것도 좋은 추억이 될 것 같다. 역동적으로 발전하는 중국의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었다. 조만간 베이징을 다시 한번 찾게 될 것 같다. 그 때는 중국어를 좀 더 익혀서 자유 여행에 도전해 볼 계획이다.

2012년 9월 21일 금요일

문화유산답사-수원 화성


수원 화성에 갔다. 화성은 정조대왕때 만든 성이다. 수원 화성은 방위의 목적외에도 서울을 대신할 신도시  개념으로 축조한 성으로 정조임금이 말년에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고 여생을 보내기 위해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정조임금이 사망하고 정순왕후가 정권을 잡자 화성 신도시 계획은 백지화되고 말았다. 수원 화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성으로 18세기 성 축조방식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문화재이다.


버스를 타고 창룡문에  내렸다. 수원 시민은 공짜로 입장이 가능하지만 일반 관람객의 경우 1000원의 입장료를 내야한다. 성벽길을 따라 산책하는 기분으로 걸으면서 화성과 그 주변 경치를 감상하였다. 화성은 성벽과 둘레의 전각을 제외하면 성 안과 밖이 모두 수원 시가지다.  화성 성벽의 가장 큰 특징은 아랬쪽은 화강암으로 위쪽은 벽돌로 쌓았다는 점이다. 자세히 보면 화강암 돌들이 모두 사이즈가 다른데도 불구하고 레고블럭처럼 가지런하게 쌓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크기가 다른 사각형의 돌들을 쌓다보면 분명 모서리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런 곳은 돌의 모서리를 깍아서 서로 맞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성벽을 따라 걷다보면 팔달문이 나오는데 현재는 보수공사중이다. 팔달문을 지나서 성은 언덕으로 이어진다. 언덕위에서는 수원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계속 걷다보면 장안문이 보인다. 장안문은 숭례문보다 더 큰 문으로 우리나라의 옛날 문 가운데서는 가장 큰 문이라고 한다. 화성 사대문의 특징은 성문 밖에 옹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문의 수비를 더욱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화성을 한바퀴 돌아 다시 창룡문으로 돌아왔다.

2012년 9월 12일 수요일

답사-서대문 형무소


8월 24일 토요일 오전 서대문 형무소에 갔다. 서대문 형무소는 일제 시대와 군사독재 정권 시절 독립운동가들과 정치범들을 수감했던 교도소로 1987년 형무소가 의왕시로 이전한 이후로는 역사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서대문 형무소는 1907년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한 이후 일제가 만든 형무소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던 많은 분들이 이곳에 수감되었으며 또한 많은 분들이 이곳에서 죽어갔다.

역사관에는 일제강점기 때 이곳에 수감되었던 많은 독립운동 지사들의 사진들이 벽에 빼곡히 붙여져 있었다. 3.1운동 당시 체포되어 수감되었던 한용운 선생의 사진도 볼 수 있는데 정면을 향해 노려보는 눈빛이 아주 매섭고 인상적이었다. 또한 유관순 열사의 사진도 볼 수 있었다. 유관순 열사는 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다 옥사 하였다. 일본놈들은 심지어 유관순 열사의 시신을 아주 잔혹하게 훼손하였다고 한다.

일제는 이곳 형무소에서 독립운동가들에게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고문을 자행하였다. 역사관에는 당시 고문의 모습과 고문에 사용했던 기구들을 전시해 놓고 있었다. 한 나라의 주권을 침탈하고 그 국민들을 복종시키기 위해서 그들은 이런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다.
 

이곳에는 일제시대 때 이육사와 함께 수감생활을 했던 이병희 지사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고문 두려워 하면 독립 운동 할 수 없다.” 그들은 잔인한 고문과 비인간적인 수감생활을 할 각오를 하면서 독립운동을 한 것이다.
자신을 희생하면서 독립을 위해 싸운 분들이 있었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일신의 영달을 위해서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은 친일파들도 있었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일제에 의해 착취를 당했지만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들은 작위를 받고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들이 해방후에도 우리 사회의 주류가 되었다는 점이다. 해방 후 친일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친일파들은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 건재해 있다.

넓은 서대문 형무소 한 곳에는 사형 집행장이 있다. 이곳에서 사형수들을 교수형에 처하였다. 사형대에서 죽은 시신은 가족들에게 인계 되었지만 연고자가 없는 경우는 화장터로 보내졌다. 그러나 고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서 시신을 강제로 화장 해버리는 경우도 많았다.

서대문 형무소는 일제시대 뿐만 아니라 유신 시대에도 정치범들을 수용했던 곳이다. 형무소 곳곳에서 당시의 비인간적인 수감 생활을 확인 할 수 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군사독재 정권이 서로 바톤 터치를 했을 뿐 이 곳 형무소에서 잔인한 고문과 인권 탄압은 계속되었다.

2012년 9월 2일 일요일

치욕의 역사를 간직한 창덕궁


창덕궁은 종묘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궁궐로 가장 한국적인 궁전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파괴된 후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기 전까지 창덕궁은 창경궁과 함께 정궁의 역할을 하였다. 정조대왕을 비롯하여 조선 후기의 임금들이 주로 거처 하던 곳이 바로 이 창덕궁이다. 또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거처하던 궁궐이 바로 창덕궁이다. 현재의 창덕궁은 순종 당시의 모습이라고 보면 된다.


창덕궁의 정문은 돈화문이다. 왕궁의 정문은 덕수궁을 제외하고 다 화(化)자 돌림이다. 경복궁은 광화문, 창경궁은 홍화문이다. 입장료는 궁궐 일반 관람이 3000원, 후원까지 관람할 경우 8000원인데, 가격이 꽤 많이 올랐다. 창덕궁 후원은 두 번 구경하였는데 반드시 가이드의 인솔을 받아야 한다. 오늘은 궁궐 관람만 하기로 했다.

돈화문을 지나자 안내방송이 들렸다. 곧 한국어 가이드의 설명을 들을 수 있는 투어가 시작된다고 한다. 가이드를 따라서 정조 때 만들었다는 규장각도 보고 궐내각사를 두루 돌아보았다. 가이드는 안내 책자에 나오지 않는 세밀하고 중요한 내용들 까지도 꼭 집어서 말해 주었다.


창덕국에는 경복궁에 비해 유독 일본인 관광객들이 많다.  왜 유독 창덕궁에 일본인들이 많이 올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그것은 창덕궁이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이 거처하던 곳이라는 사실에서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 같다. 순종은 일제에게 나라를 건네준 인물이다. 그는 아버지 고종에 비해 나라를 지키려는 의지도 없었고 카리스마도 없는 인물이었다. 고종은 을사조약이후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하는등 마지막까지 나라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노력을 했다. 그로 인해 그는 일제에의해 강제로 퇴위를 당했다.

하지만 고종을 이은 순종은 그야말로 이름뿐인 황제였다. 순종은 병약하여 후사도 없었으며 일본이 내려준 이왕이라는 작위로 창덕궁에서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따라서 창덕궁은 일왕이 임명한 왕인 순종이 거처하던 곳으로 일제의 조선 식민지 지배를 상징하는 곳이다. 그리고 창덕궁은 한일 합방 조약이 체결된 곳이다. 창덕궁 대조전이 바로 한일합방 조약이 체결된 곳이다. 이렇듯 창덕궁은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치욕의 장소이지만 일본놈들에게는 조선 식민지 지배와 과거의 영화에 대한 향수가 남아있는 곳이다. 일제 강점기에 창덕궁을 보수할 때 일제는 경복궁의 전각을 허물어 자재를 충당했다. 새로운 자재를 사용하지 않고 궂이 경복궁의 전각을 헐어버린 이유는 경복궁이 조선 왕조의 법궁으로 조선의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이 창덕궁을 많이 찾는 이유를 이제 알 수 있을 것이다.

가이드를 따라서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과 대조전을 구경하였다. 인정전 안에는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는 것이 특이한데 순종은 이곳에서 주로 연회를 열었다고 한다. 대조전은 왕비가 거처하던 곳으로 다른 궁궐들과는 달리 문이 창호가 아닌 유리로 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대조전에는 순종황제와 왕비가 사용하였던 가구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순종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자동차를 타고 다녔던 왕인데 차를 타고 내리기 편하도록 전각을 고친 모습도 볼 수 있다.

가이드를 따라 마지막으로 낙선재를 구경하였다. 낙선재는 영친왕의 비 이방자와 고종황제의 마지막 딸인 덕혜옹주가 생을 마감한 곳이다. 원래 낙선재는 헌종 임금이 자신이 총애하던 후궁을 위해 지어준 전각이라고 한다.


2012년 8월 29일 수요일

문화유산 답사-남한산성


8월 26일 일요일 남한산성에 갔다. 지하철 8호선을 타고 산성역에서 내려 52번 버스로 환승해서 남한산성 남문에서 내렸다. 남문에는 지화문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남한산성에는 4개의 성문이 있다. 그 중 남문과 동문이 사용 빈도가 높은 곳이라고 한다.

남문에서 약 1km정도 산책로를 따라 올라가면 수어장대가 나온다. 수어장대는 남한산성 수비대의 총사령부와 같은 곳이다. 수어장대 옆에는 무망루라는 누각이 있고 그 안에는 비석이 놓여 있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에 맞서 인조임금이 47일동안 항전을 펼쳤던 곳이다. 그러나 군량미가 떨어지고 세자가 강화도에서 생포되자 결국 항복하게 된다. 무망루는 그 때의 일을 상기하며 영조임금이 세운 누각이다.

수어장대 바로 옆에는 청량당이라는 작은 사당이 있다. 청량당은 남한산성을 축성한 장군 이회를 추모하기 위한 사당이다. 남한산성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국가 재원이 들어가는 거대한 토목 사업이었다. 그런데 수어장대쪽 축성을 담당한 이회 장군이 공사비를 횡령했다는 누명을 쓰고 문초끝에 처형을 당한다. 그리고 장군의 부인도 남편을 따라 강물에 뛰어들어 자결을 하였다. 그런데 얼마후에 이회장군이 죄가 없고 억울하게 죽었음이 밝혀지자 이곳에 장군을 모시는 사당을 지었다.

수어장대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서문이 나온다. 서문에는 우익문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서문은 남한산성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문으로 그렇게 많이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송파나루에서 가깝기 때문에 전쟁 물자를 한양에서 긴급히 수송할때 이용되었다고 한다. 남한산성의 성벽은 산의 능선을 따라서 둘러져 있다.


서문에서 성벽을 따라 내려가면 북문이 나온다. 북문은 전승문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병자호란 당시 약 300명의 병사들이 이 문을 나와 청군을 기습하려고 했으나 청군의 계략에 말려 모두 몰살당하였다.

전승문에서 조금 내려오면 종로 거리가 나온다. 남한산성은 산성안에 마을이 있어서 예로부터 산성리라고 불리웠다고 한다. 남한산성의 읍락이었던 이곳은 지금은 등산객들을 위한 음식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종로에서 조금 올라가는 남한산성 행궁이 있다. 행궁이란 임금이 거처하는 도성밖의 궁궐을 의미한다. 남한산성 행궁은 복원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행궁의 정문은 한남루라는 누각인데 다른 궁궐의 정문과 달리 이층 누각인 것이 특이하다.


한남루를 지나면 고증을 통해 복원한 정방형의 연못이 있고. 행각을 지나면 외행전과 내행전이 나온다. 행각은 주로 궁녀나 수비군들의 처소로 이용되던 곳이고 임금이 정무를 보는 곳은 외행전 침전은 내행전이다. 특이한 점은 외행전 마당 옆에 통일신라시대때 집터가 보이는데 남한산성 행궁의 발굴 및 복원 과정에서 발견된 것이라고 한다. 이 집터는 신라시대 건축 양식으로 복원예정이라고 한다. 내행전의 뒤편으로는 이위정이라는 정자가 있고 후원이 있어서 온전한 궁궐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남한산성 행궁은 종묘와 사직을 갖추고 있는 유일한 행궁으로 유사시에 이곳이 수도로서의 역할을 했었음을 알 수 있다.

마침 외행전 마당에서는 조선시대 전통 무술 시범 공연이 벌어지고 있었다. 행궁 구경을 마치고 배가 고파 옥수수를 산 후에 침괘정이 있는 언덕으로 올라가 벤치에 앉아서 먹었다. 침괘정은 군사용으로 만든 전각이라고 하는데 마당에는 화약을 만들었던 터가 남아 있다.

침괘정에서 아래로 내려오면 연무관이라는 전각이 보이는데 마찬가지로 군사시설로 지어진 전각이다. 연무관에서 아래로 내려오면 현절사라는 사당이 있다. 현절사는 병자호란 때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여 청나라에 끌려가 순절한 삼학사를 기리기 위해 숙종 때 지어진 사당이다. 하지만 정문이 잠겨 있어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현절사에서 조금 내려오면 남한산성 역사기념관이 있다. 안에 전시된 유물들은 별로 볼게 없지만 전시관내 TV에서는 남한산성의 역사를 소개해주는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었다. 역사 기념관에서 조금 내려오면 지수당이라는 연못과 정자가 있다. 그 아래로 더 내려오면 동문이 있다.

병자호란때 조선이 청나라에 배한 이유는 남한산성이 함락되어서가 아니라 오랜 항전으로 인해 식량이 바닥났기 때문이다. 남한산성은 매우 견고한 성이다. 인조가 항복을 한 후에 북벌론이 제기되었을 때에도 남한산성은 또한 북벌론의 중심지가 되었다.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은 북벌을 위해서 남한산성을 보수하고 이곳에서 군사들을 조련시켰다. 하지만 북벌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2012년 8월 24일 금요일

문화유산답사-덕수궁


덕수궁의 원래 이름은 경운궁이다. 덕수궁이란 명칭은 고종황제의 휘호가 ‘덕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일제에 의해 강제적로 퇴위당한 고종황제의 휘호를 그대로 썼기 때문에 이 또한 문제가 있어 보인다. 어쨌든 덕수궁은 고종황제가 아관파천후에 약 10년간 대한제국의 황제로 군림했던 곳이고 함녕전에서 돌아갈 때까지 머물렀던 궁이다.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을 들어서면 금천교가 보인다. 물이 흐르지 않기 때문에 다리라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지만 금천교를 지나면 우뚝한 나무들이 있는 아름다운 산책로가 펼쳐진다. 산책로를 따라 걷다보면 중화문이 보이고 중화문을 지나면 중화전이 보인다. 중화전은 덕수궁의 정전으로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과는 몇가지 차이점이 있다. 이층으로 된 월대에는 난간이 없고 석수도 없다. 그리고 근정전이 복층인데 비해 중화전은 단층이고 창호도 푸른색이 아닌 황제를 상징하는 노란색이다. 뿐만 아니라 월대의 돌계단에 있는 답도에는 봉황이 아닌 용이 새겨져 있어서 이곳이 황제가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중화전 뒤편으로는 석어당과 즉조당이 있다. 석어당은 덕수궁의 유일한 2층 전각으로 단청이 없는 것이 특이하다. 이곳은 광해군 때 인목대비가 유폐되었던 곳이다. 전각의 2층은 마치 다락방처럼 슬림한 것이 이색적인데, 이런 양식의 전통 가옥은 쉽게 보기 어려울 것 같다.

즉조당은 고종이 황제즉위식을 가졌던 곳이다.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을 겪으면서 고종은 마음을 굳게 먹고 나라를 일신하기 위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변경하고 황제에 오른다.


고종은 급진적인 개화나 척화론을 모두 배격하고 과거의 것을 존중하면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의 정신을 슬로건으로 내 걸었다. 외세에 의존한 급진개화사상이나 서구문물을 무조건 반대하는 위정척사사상을 배제한 중용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석조전은 우리나라 궁궐에 남아 있는 유일한 서양식 건물이다. 석조전은 신고전주의 양식의 고종의 의지로 지어진 건물이다. 지금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일제에 의해 경복궁과 창경궁에 지어졌던 서양식 건물들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석조전은 현재 준공 당시 내부 모습을 복원하기 위해 공사중이다. 석조전 앞에는 분수대와 정원이 있다. 이것은 영국인 건축가에 의해 지어진 서양식 정원이다. 석조전 옆에는 별관 건물이 있는데 현재는 덕수궁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석어당에서 정문쪽으로 내려오면 침전인 함녕전과 덕홍전이 있다. 함녕전은 고종이 승하한 곳으로 내부에 서양식 샹들리에가 있는 것이 특이하다. 고종은 서양 문물에 관심이 많았고  이를 받아들이는데 매우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함녕전에서 뒤편으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정관헌이 나온다. 이 건물도 참 독특하다. 이곳은 고종이 휴식을 취한 정원인데 전통적인 정자가 아닌 서양식 건축이다. 러시아의 건축가 사바친이 설계하였는데 전체적인 모습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처럼 보이지만 기둥이 나무고  전통 한옥처럼 팔각 지붕이지만 처마는 없다. 정관헌은 전통건축과 서양건축을 융합시킨 독창적인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으로 덕수궁 관람을 마쳤다. 현재의 덕수궁은 고종 당시에 비해 많이 축소된 것이다. 현재 시청앞 광장과 환구단 그리고 구세군교회와 조선일보 건물이 있던 곳까지 덕수궁터였다. 석조전 뒤편으로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걷다보면 정동공원이 나오는데 공원 위쪽에 구 러시아 공사관의 조망탑이 남아 있다. 을미사변 이후 러시아는 고종이 가장 신뢰했던 나라였다. 고종이 아관파천후 덕수궁으로 환어한 이유도 러시아 공사관이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종이 황제에 오르면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환구단은 현재 프레지던트 호텔 뒤편에 있다. 현재는 황궁우와 석고 그리고 정문만 남아 있다. 황궁우는 선왕의 신위를 모신 단으로 3층의 육각 전각이 웅장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현재 황궁우 주변은 도심속 공원으로 일상에 지친 시민들의 작은 쉼터가 되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