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29일 수요일

문화유산 답사-남한산성


8월 26일 일요일 남한산성에 갔다. 지하철 8호선을 타고 산성역에서 내려 52번 버스로 환승해서 남한산성 남문에서 내렸다. 남문에는 지화문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남한산성에는 4개의 성문이 있다. 그 중 남문과 동문이 사용 빈도가 높은 곳이라고 한다.

남문에서 약 1km정도 산책로를 따라 올라가면 수어장대가 나온다. 수어장대는 남한산성 수비대의 총사령부와 같은 곳이다. 수어장대 옆에는 무망루라는 누각이 있고 그 안에는 비석이 놓여 있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에 맞서 인조임금이 47일동안 항전을 펼쳤던 곳이다. 그러나 군량미가 떨어지고 세자가 강화도에서 생포되자 결국 항복하게 된다. 무망루는 그 때의 일을 상기하며 영조임금이 세운 누각이다.

수어장대 바로 옆에는 청량당이라는 작은 사당이 있다. 청량당은 남한산성을 축성한 장군 이회를 추모하기 위한 사당이다. 남한산성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국가 재원이 들어가는 거대한 토목 사업이었다. 그런데 수어장대쪽 축성을 담당한 이회 장군이 공사비를 횡령했다는 누명을 쓰고 문초끝에 처형을 당한다. 그리고 장군의 부인도 남편을 따라 강물에 뛰어들어 자결을 하였다. 그런데 얼마후에 이회장군이 죄가 없고 억울하게 죽었음이 밝혀지자 이곳에 장군을 모시는 사당을 지었다.

수어장대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서문이 나온다. 서문에는 우익문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서문은 남한산성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문으로 그렇게 많이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송파나루에서 가깝기 때문에 전쟁 물자를 한양에서 긴급히 수송할때 이용되었다고 한다. 남한산성의 성벽은 산의 능선을 따라서 둘러져 있다.


서문에서 성벽을 따라 내려가면 북문이 나온다. 북문은 전승문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병자호란 당시 약 300명의 병사들이 이 문을 나와 청군을 기습하려고 했으나 청군의 계략에 말려 모두 몰살당하였다.

전승문에서 조금 내려오면 종로 거리가 나온다. 남한산성은 산성안에 마을이 있어서 예로부터 산성리라고 불리웠다고 한다. 남한산성의 읍락이었던 이곳은 지금은 등산객들을 위한 음식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종로에서 조금 올라가는 남한산성 행궁이 있다. 행궁이란 임금이 거처하는 도성밖의 궁궐을 의미한다. 남한산성 행궁은 복원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행궁의 정문은 한남루라는 누각인데 다른 궁궐의 정문과 달리 이층 누각인 것이 특이하다.


한남루를 지나면 고증을 통해 복원한 정방형의 연못이 있고. 행각을 지나면 외행전과 내행전이 나온다. 행각은 주로 궁녀나 수비군들의 처소로 이용되던 곳이고 임금이 정무를 보는 곳은 외행전 침전은 내행전이다. 특이한 점은 외행전 마당 옆에 통일신라시대때 집터가 보이는데 남한산성 행궁의 발굴 및 복원 과정에서 발견된 것이라고 한다. 이 집터는 신라시대 건축 양식으로 복원예정이라고 한다. 내행전의 뒤편으로는 이위정이라는 정자가 있고 후원이 있어서 온전한 궁궐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남한산성 행궁은 종묘와 사직을 갖추고 있는 유일한 행궁으로 유사시에 이곳이 수도로서의 역할을 했었음을 알 수 있다.

마침 외행전 마당에서는 조선시대 전통 무술 시범 공연이 벌어지고 있었다. 행궁 구경을 마치고 배가 고파 옥수수를 산 후에 침괘정이 있는 언덕으로 올라가 벤치에 앉아서 먹었다. 침괘정은 군사용으로 만든 전각이라고 하는데 마당에는 화약을 만들었던 터가 남아 있다.

침괘정에서 아래로 내려오면 연무관이라는 전각이 보이는데 마찬가지로 군사시설로 지어진 전각이다. 연무관에서 아래로 내려오면 현절사라는 사당이 있다. 현절사는 병자호란 때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여 청나라에 끌려가 순절한 삼학사를 기리기 위해 숙종 때 지어진 사당이다. 하지만 정문이 잠겨 있어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현절사에서 조금 내려오면 남한산성 역사기념관이 있다. 안에 전시된 유물들은 별로 볼게 없지만 전시관내 TV에서는 남한산성의 역사를 소개해주는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었다. 역사 기념관에서 조금 내려오면 지수당이라는 연못과 정자가 있다. 그 아래로 더 내려오면 동문이 있다.

병자호란때 조선이 청나라에 배한 이유는 남한산성이 함락되어서가 아니라 오랜 항전으로 인해 식량이 바닥났기 때문이다. 남한산성은 매우 견고한 성이다. 인조가 항복을 한 후에 북벌론이 제기되었을 때에도 남한산성은 또한 북벌론의 중심지가 되었다.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은 북벌을 위해서 남한산성을 보수하고 이곳에서 군사들을 조련시켰다. 하지만 북벌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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