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 17일 화요일

파리테러사건과 서방의 반(反)이슬람 정서

11월 13일 파리의 공연장에서 무장괴한의 총격으로 130여명이 사망하고 수백명이 부상당하는 테러사건이 발생했다. 파리 총격테러사건은 현재까지의 정황으로는 IS등 이슬람 무장단체의 소행으로 추정되고 있다. 파리 테러사건은 안타까운 사건이지만 한편으로는 서방의 반(反)이슬람 정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일깨우는 사건이기도 하다. 올 초 무슬림을 비웃고 이슬람교를 조롱한 신문사에 무장괴한이 난입 총기를 난사한 샤를리 엡도 테러사건이 발생했다. 물론 테러는 절대 용납되어서는 안 될 반인류적 범죄행위다. 하지만 무슬림들이 서방에 대하여 왜 저토록 증오에 가까운 반감을 갖게 되었는지 그 배경을 이해해야만 한다. 유럽과 북미등 기독교문화를 배경으로 한 서방국가들은 종교적인 이유로 이슬람에 대해서 뿌리깊은 반감을 갖고 있다. 이슬람교가 창시된 7세기 이후 유럽의 기독교문화와 이슬람문화는 끝없이 대립을 지속해 왔다. 마지막 이슬람제국인 오스만투르크가 멸망한 후에도 이슬람과 기독교문명의 대립은 지속되고 있다. 서방세계에서 이슬람에 대한 반감이 증폭된 계기는 9.11 테러사건이었다. 냉전이 종식된 이후에 서구문명의 가장 큰 적은 이슬람문명이라는 문명충돌론이 제기되었는데 9.11은 서구사회에서 이슬람을 적대감과 기독교적 우월주의가 팽배한 시기에 발생한 사건이다. 9.11 이후에 서구사회에는 무슬림=테러리스트라는 인식마저 생겨날 정도로 이슬람에 대한 정서는 악화되었다. 무슬림들에 대한 서구인들에 대한 반감은 단순히 종교적 차원을 넘어 중동과 북아프리카인들에 대한 인종적 편견과 차별을 동반하고 있다. 현재 유럽에는 터키와 중동에서 건너온 이주노동자들이 많이 살고 있다. 그들은 대부분 백인들이 꺼려하는 저임금 노동을 하며 살고 있다. 그들은 서구의 백인들에게 종교적, 인종적, 경제적 차별대우를 받으며 살고 있다. 현재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의 점령지에서 인티파다를 벌이고 있다.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미국등 서방국가들은 인티파다를 테러로 매도하고 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인들의 인티파다도 서구(백인)와 기독교(유대교)에 대한 무슬림들의 저항이다.

무슬림들의 서구와 기독교에 대한 반감 역시 증폭되고 있다. 9.11테러 이후 미국등 서방국가들은 무슬림들을 테러리스트로 지목하고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였고 대테러 전쟁으로 수많은 이슬람 민간인들이 희생되었다. 뿐만 아니라 서구는 2011년 '아랍의 봄'에 개입하여 리비아의 카다피정권을 붕괴시키고 시리아에서 내전을 일으키는 등 중동지역을 혼란에 빠뜨렸다. 이 모든 혼란의 주범이 서구 기독교세력이란 사실을 중동지역의 무슬림들은 잘 알고 있다. 시리아에서만 전쟁으로 22만명이 희생되었고 리비아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등 서방이 개입한 전쟁으로 인해 죽어간 무슬림들의 숫자는 그보다 훨씬 많다. 파리테러에서 희생된 민간인들의 숫자는 이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만약 서방이 문명적, 종교적, 인종적 우월주의에 입각하여 계속해서 무슬림들을 억압하고 탄압한다면 파리테러사건과 같은 사건은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다.

2015년 11월 11일 수요일

대한민국(大韓民國)의 건국원년은 1919년이다.

중화민국(中華民國)은 1911년 무창봉기로 청왕조를 무너뜨리고 손문(孫文)선생의 주도로 1912년 탄생한 아시아 최초의 민주공화국이다. 1910년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일본에 합병되자, 1919년 독립운동가들이 주축이 되어 상해에 임시정부(臨時政府)를 수립했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는 국호를 중화민국을 본따서 대한민국(大韓民國)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의 기원이다. 대한민국은 대한제국의 뒤를 이은 민주공화국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러나 최근 일부 한국의 극우세력들은 1948년 8월 15일을 대한민국의 건국절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 대한민국의 역사를 왜곡한 것이다. 그들이 1948년을 대한민국 건국원년으로 주장하는 것은 대한민국이 일제 35년의 뒤를 이어 건국한 나라로 일본의 한반도 통치가 결코 불법적이거나 암흑의 시기가 아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들이 이러한 주장을 하는 이유는 그들이 대부분 일제시대 부를 축적한 재벌과 관료 그리고 군인들 즉 친일파들의 후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심지어 일제시대를 수탈과 착취의 시대가 아닌 근대화의 시기로 보고 있다. 하지만 진실은 대한민국의 기원은 1919년 상해임시정부라는 것이다. 일제의 한반도 통치시기에도 분명 대한민국 정부는 존재하였고 그들은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기 위하여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1948년을 건국원년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상해임시정부의 정통성과 독립운동의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결코 1948년 이승만이 만든 나라가 아니다. 대한민국은 이미 30년 이전부터 존재한 나라였다.

2015년 11월 8일 일요일

타이완(臺灣) 여행

11월 5일부터 8일까지 3박4일 일정으로 타이완(주로 타이베이)을 여행하였다. 타이완 여행은 세미패키지 프로그램으로 하였는데 교통이 편리한 타이베이 시내는 자유여행, 타이베이 외곽의 관광지는 패키지로 여행을 하였다.

타이완 여행 첫날, 타이베이 송산공항에 도착하여 가이드의 안내로 중정기념당, 롱산쓰(용산사 龍山寺), 화시지에 야시장을 방문하였다.


 
중정기념당(中正記念堂)은 장개석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기념관이다. 장개석은 국공내전에서 패배하여 타이완으로 쫒겨난후 1975년 죽일 때까지 일다독재로 타이완을 통치하였다. 국공내전에서 장개석의 국민당이 모택동의 공산당에게 패한 결정적인 이유는 중국민중들에 대한 국민당정부의 과도한 약탈과 착취 때문이었다. 장개석은 중국에서 약탈한(?) 엄청난 재물과 전세계 화교들의 지원에 힘입어 타이완을 아시아의 네마리 용 가운데 하나로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타이완(중화민국)의 정치적 위상은 중화인민공화국의 부상과 함께 점점 위축되어 UN상임이사국 지위마저 박탈당하였다. 한편으로 중화민국은 상해임시정부를 최초로 인정한 정부였다. 그리고 장개석은 김구주석과 임시정부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였고 조선의 독립을 적극 지지하였다. 카이로 회담에서 조선의 독립이 명문화된 것도 장개석의 공이었다. 때문에 장개석은 한국현대사와도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인물이다. 현재 타이완은 UN회원국도 아니고 타이완을 국가로 인정하는 나라는 22개국에 불과하다. 그것도 대부분은 태평양의 섬나라등 소국들이다. 타이완은 중국은 분명 아니지만 외교적으로 독립국가도 아닌 어중간한 위치의 나라다. 


롱산쓰(용산사)는 타이베이 시내에 위치한 불교사원이다. 타이완은 도교의 전통이 강한 나라로 불교사원들에도 도교적 요소가 많이 융합되어 있다. 용산사에도 도교에서 숭앙하는 관우신이 모셔져 있다. 화시지에 야시장(夜市場)은 롱산쓰 바로 옆에 있는 재래시장으로 주로 먹거리가판대들이 즐비한 먹자골목이다. 타이완은 일년 내내 더운 날씨가 지속되기 때문에 대부분의 재래시장들은 오후나 저녁때 붐비는 야시장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타이완 여행 둘째 날. 자유여행으로 고궁박물관, 타이베이101 주변, 시먼딩 거리, 스린(士林) 야시장을 둘러보았다. 
고궁박물관은 아시아 최대의 박물관으로 중국의 역대 유물들이 전시된 곳이다. 이 곳에 전시된 도자기등 유물들은 모두 장개석이 대륙에서 건너오면서 가져온(약탈해온) 것들이다. 고궁 박물관에서는 신석기시대부터 중화민국까지 중국의 중요 문화유산들을 볼 수 있으며 타이완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타이베이101(타이베이 세계금융센터)은 타이베이를 상징하는 초고층 빌딩으로 2003년에 완공되었으며 높이가 무려 508m에 달한다. 타이베이101은 2010년 두바이 부르즈 할리파가 완공되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었다. 타이베이101은 저층부와 지하는 쇼핑몰, 중간층은 비지니스 용도, 최상층은 전망대로 사용되고 있다. 타이베이101은 세계 최고층 빌딩 지위는 넘겨주었지만 전망대까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의 속도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것으로 유명하다. 타이베이101 주변으로는 백화점과 쇼핑몰이 밀집해 있다. 

시먼(西門)딩 거리는 타이베이의 명동거리로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쇼핑거리다. 시먼딩 거리에는 주로 의류, 잡화, 패션, 화장품가게들이 밀집해 있으며 주로 젊은층들을 겨냥한 마케팅을 하는 곳이다. 
스린(士林)야시장은 가게들이 들어선 골목이 끝없이 이어져 있는 타이베이 최대의 야시장이다. 특히 저녁무렵과 밤에는 인산인해로 발디딜 틈조차 없을 정도로 성업을 하고 있는 야시장이다. 스린야시장은 의류,신발,잡화는 물론 온갖 종류의 먹거리가게들이 이어져 있다. 스린야시장은 타이베이 시민들은 물론 외국인 관광객들도 즐겨찾는 관광코스이지 흥겨운 쇼핑거리이다.

타이완 여행 삼일째. 패키지 일행과 함께 예류(野柳)지질공원, 진과스(金瓜石), 지우펀(九份), 스펀(十分)을 방문하였다. 

예류지질공원은 타이베이에서 버스로 약 40분 정도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풍화작용에 의해 갖가지 기이한 모습을 하고 있는 바닷가의 사암들을 감상할 수 있다.  
진과스는 19세기 말부터 일제통치시기에 금광이 있던 광산마을로 현재는 관광지로 탈바꿈된 곳이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1895년부터 1945년 2차대전에서 패망하기까지 타이완을 통치하였는데 식민시절 이곳에서 생산된 금은 대부분 일본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지우펀은 영화 '비정성시'로 유명한 마을로 진과스와는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비정성시는 2.28사건을 배경으로 한 영화다. 2.28사건이란 1947년 장개석정부가 국민당정부에 저항하는 타이완주민들을 무력으로 제압한 사건으로 타이완 현대사의 오점으로 남아있는 사건이다. 정확한 통계는 없으나 정부군의 무력진압으로 약 3만에서 5만명의 타이완 주민들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아픈 역사의 배경이 된 지우펀은 현재는 수많은 방문객으로 붐비는 관광지가 되었다. 상점들이 들어선 좁은 거리를 끝없이 따라가다보면 좁은 계단길이 나오는데 워낙 관광객들이 많아서 이제는 조용한 시골동네의 정취는 느낄 수가 없다.
 스펀은 철도역이 있던 시골마을인데 현재는 천등을 날리는 관광지가 되었다. 이곳에서는 철길위에서 관광객들이 각자 소원을 적은 천등을 하늘로 날려보내는데 하늘위로 올라가는 천등을 끊임없이 볼 수 있다.

타이베이 시내로 돌아와서 용캉제거리를 둘러본 후 타이베이101 전망대를 올라갔다. 세계 최고층 빌딩의 지위를 잃어버린 타이베이 101은 이제는 세계 최고속 엘리베이터를 보유한 빌딩이라고 홍보한다. 5층에서 384m에 위치한 89층 전망대까지 약 35초면 올라가는데 정말 눈깜짝할 사이에 올라간다. 타이베이 101은 지진과 태풍에도 견딜수 있도록 설계되었는데 그 비밀은 거대한 추에 있다. 타이베이101은 꼭대기에 660톤짜리 추를 매달아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추가 흔들리면서 균형을 잡도록 되어 있다. 때문에 얼마전 초특급 태풍이 타이완을 강타했을 때도 타이베이101은 끄떡없이 버틸 수 있었다고 한다. 타이베이101전망대에서는 타이베이시를 동서남북으로 모두 조망할 수 있는데, 전망대에서 바라본 타이베이의 야경 또한 매우 훌륭하다.
타이베이101 관람을 끝으로 3박4일 타이완 여행을 마쳤다. 타이완은 3만6천제곱킬로미터의 국토면적에 2천3백만명이 살고 있는 인구 초과밀국가다. 그나마 국토의 70%는 산악지대이기 때문에 체감으로 느끼는 인구밀도는 훨씬 높다. 지하철(MRT)을 타보면 타이완의 높은 인구압을 실감할 수 있다. 

타이완은 50년간의 일제통치시기를 겪어서인지 일본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일본과 비슷한 면이 많다고 알려졌다. 여성들의 화장이나 패션스타일도 일본과 유사한 점이 많다. 그리고 타이완에는 일본관광객들도 많이 온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타이완은 일본과 유사한 면 보다는 중국문화가 더 우세하다. 타이완이 일본과 비슷한 면도 있지만 그것은 일부분에 불과하다. 타이완은 그저 타이완이다.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행기간중인 11월 7일 싱가포르에서 시진핑과 마잉주의 역사적인 양안정상회담이 열렸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이후 66년만의 역사적인 회담이다. 국민당 정부는 지금까지 친중국적인 행보를 유지하고 있다. 반면 야당인 민진당은 '타이완의 독립'을 주장하고 있다. 타이완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타이완의 경제를 위해서는 중국과의 협력이 필수적이다. 때문에 당분간 타이완은 독립등 정치적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중국과의 경제협력을 강화하는 실리적 노선을 견지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도 타이완이 독립을 시도하지 않는한 무력을 사용하지는 않을 것이며 현재와 같은 교류협력을 통해 우호적인 양안관계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타이완의 독립은 양안관계를 언제든 냉각시킬 수 있는 매우 민감한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