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29일 수요일

문화유산 답사-남한산성


8월 26일 일요일 남한산성에 갔다. 지하철 8호선을 타고 산성역에서 내려 52번 버스로 환승해서 남한산성 남문에서 내렸다. 남문에는 지화문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남한산성에는 4개의 성문이 있다. 그 중 남문과 동문이 사용 빈도가 높은 곳이라고 한다.

남문에서 약 1km정도 산책로를 따라 올라가면 수어장대가 나온다. 수어장대는 남한산성 수비대의 총사령부와 같은 곳이다. 수어장대 옆에는 무망루라는 누각이 있고 그 안에는 비석이 놓여 있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에 맞서 인조임금이 47일동안 항전을 펼쳤던 곳이다. 그러나 군량미가 떨어지고 세자가 강화도에서 생포되자 결국 항복하게 된다. 무망루는 그 때의 일을 상기하며 영조임금이 세운 누각이다.

수어장대 바로 옆에는 청량당이라는 작은 사당이 있다. 청량당은 남한산성을 축성한 장군 이회를 추모하기 위한 사당이다. 남한산성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국가 재원이 들어가는 거대한 토목 사업이었다. 그런데 수어장대쪽 축성을 담당한 이회 장군이 공사비를 횡령했다는 누명을 쓰고 문초끝에 처형을 당한다. 그리고 장군의 부인도 남편을 따라 강물에 뛰어들어 자결을 하였다. 그런데 얼마후에 이회장군이 죄가 없고 억울하게 죽었음이 밝혀지자 이곳에 장군을 모시는 사당을 지었다.

수어장대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서문이 나온다. 서문에는 우익문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서문은 남한산성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문으로 그렇게 많이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송파나루에서 가깝기 때문에 전쟁 물자를 한양에서 긴급히 수송할때 이용되었다고 한다. 남한산성의 성벽은 산의 능선을 따라서 둘러져 있다.


서문에서 성벽을 따라 내려가면 북문이 나온다. 북문은 전승문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병자호란 당시 약 300명의 병사들이 이 문을 나와 청군을 기습하려고 했으나 청군의 계략에 말려 모두 몰살당하였다.

전승문에서 조금 내려오면 종로 거리가 나온다. 남한산성은 산성안에 마을이 있어서 예로부터 산성리라고 불리웠다고 한다. 남한산성의 읍락이었던 이곳은 지금은 등산객들을 위한 음식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종로에서 조금 올라가는 남한산성 행궁이 있다. 행궁이란 임금이 거처하는 도성밖의 궁궐을 의미한다. 남한산성 행궁은 복원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행궁의 정문은 한남루라는 누각인데 다른 궁궐의 정문과 달리 이층 누각인 것이 특이하다.


한남루를 지나면 고증을 통해 복원한 정방형의 연못이 있고. 행각을 지나면 외행전과 내행전이 나온다. 행각은 주로 궁녀나 수비군들의 처소로 이용되던 곳이고 임금이 정무를 보는 곳은 외행전 침전은 내행전이다. 특이한 점은 외행전 마당 옆에 통일신라시대때 집터가 보이는데 남한산성 행궁의 발굴 및 복원 과정에서 발견된 것이라고 한다. 이 집터는 신라시대 건축 양식으로 복원예정이라고 한다. 내행전의 뒤편으로는 이위정이라는 정자가 있고 후원이 있어서 온전한 궁궐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남한산성 행궁은 종묘와 사직을 갖추고 있는 유일한 행궁으로 유사시에 이곳이 수도로서의 역할을 했었음을 알 수 있다.

마침 외행전 마당에서는 조선시대 전통 무술 시범 공연이 벌어지고 있었다. 행궁 구경을 마치고 배가 고파 옥수수를 산 후에 침괘정이 있는 언덕으로 올라가 벤치에 앉아서 먹었다. 침괘정은 군사용으로 만든 전각이라고 하는데 마당에는 화약을 만들었던 터가 남아 있다.

침괘정에서 아래로 내려오면 연무관이라는 전각이 보이는데 마찬가지로 군사시설로 지어진 전각이다. 연무관에서 아래로 내려오면 현절사라는 사당이 있다. 현절사는 병자호란 때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여 청나라에 끌려가 순절한 삼학사를 기리기 위해 숙종 때 지어진 사당이다. 하지만 정문이 잠겨 있어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현절사에서 조금 내려오면 남한산성 역사기념관이 있다. 안에 전시된 유물들은 별로 볼게 없지만 전시관내 TV에서는 남한산성의 역사를 소개해주는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었다. 역사 기념관에서 조금 내려오면 지수당이라는 연못과 정자가 있다. 그 아래로 더 내려오면 동문이 있다.

병자호란때 조선이 청나라에 배한 이유는 남한산성이 함락되어서가 아니라 오랜 항전으로 인해 식량이 바닥났기 때문이다. 남한산성은 매우 견고한 성이다. 인조가 항복을 한 후에 북벌론이 제기되었을 때에도 남한산성은 또한 북벌론의 중심지가 되었다.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은 북벌을 위해서 남한산성을 보수하고 이곳에서 군사들을 조련시켰다. 하지만 북벌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2012년 8월 24일 금요일

문화유산답사-덕수궁


덕수궁의 원래 이름은 경운궁이다. 덕수궁이란 명칭은 고종황제의 휘호가 ‘덕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일제에 의해 강제적로 퇴위당한 고종황제의 휘호를 그대로 썼기 때문에 이 또한 문제가 있어 보인다. 어쨌든 덕수궁은 고종황제가 아관파천후에 약 10년간 대한제국의 황제로 군림했던 곳이고 함녕전에서 돌아갈 때까지 머물렀던 궁이다.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을 들어서면 금천교가 보인다. 물이 흐르지 않기 때문에 다리라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지만 금천교를 지나면 우뚝한 나무들이 있는 아름다운 산책로가 펼쳐진다. 산책로를 따라 걷다보면 중화문이 보이고 중화문을 지나면 중화전이 보인다. 중화전은 덕수궁의 정전으로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과는 몇가지 차이점이 있다. 이층으로 된 월대에는 난간이 없고 석수도 없다. 그리고 근정전이 복층인데 비해 중화전은 단층이고 창호도 푸른색이 아닌 황제를 상징하는 노란색이다. 뿐만 아니라 월대의 돌계단에 있는 답도에는 봉황이 아닌 용이 새겨져 있어서 이곳이 황제가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중화전 뒤편으로는 석어당과 즉조당이 있다. 석어당은 덕수궁의 유일한 2층 전각으로 단청이 없는 것이 특이하다. 이곳은 광해군 때 인목대비가 유폐되었던 곳이다. 전각의 2층은 마치 다락방처럼 슬림한 것이 이색적인데, 이런 양식의 전통 가옥은 쉽게 보기 어려울 것 같다.

즉조당은 고종이 황제즉위식을 가졌던 곳이다.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을 겪으면서 고종은 마음을 굳게 먹고 나라를 일신하기 위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변경하고 황제에 오른다.


고종은 급진적인 개화나 척화론을 모두 배격하고 과거의 것을 존중하면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의 정신을 슬로건으로 내 걸었다. 외세에 의존한 급진개화사상이나 서구문물을 무조건 반대하는 위정척사사상을 배제한 중용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석조전은 우리나라 궁궐에 남아 있는 유일한 서양식 건물이다. 석조전은 신고전주의 양식의 고종의 의지로 지어진 건물이다. 지금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일제에 의해 경복궁과 창경궁에 지어졌던 서양식 건물들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석조전은 현재 준공 당시 내부 모습을 복원하기 위해 공사중이다. 석조전 앞에는 분수대와 정원이 있다. 이것은 영국인 건축가에 의해 지어진 서양식 정원이다. 석조전 옆에는 별관 건물이 있는데 현재는 덕수궁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석어당에서 정문쪽으로 내려오면 침전인 함녕전과 덕홍전이 있다. 함녕전은 고종이 승하한 곳으로 내부에 서양식 샹들리에가 있는 것이 특이하다. 고종은 서양 문물에 관심이 많았고  이를 받아들이는데 매우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함녕전에서 뒤편으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정관헌이 나온다. 이 건물도 참 독특하다. 이곳은 고종이 휴식을 취한 정원인데 전통적인 정자가 아닌 서양식 건축이다. 러시아의 건축가 사바친이 설계하였는데 전체적인 모습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처럼 보이지만 기둥이 나무고  전통 한옥처럼 팔각 지붕이지만 처마는 없다. 정관헌은 전통건축과 서양건축을 융합시킨 독창적인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으로 덕수궁 관람을 마쳤다. 현재의 덕수궁은 고종 당시에 비해 많이 축소된 것이다. 현재 시청앞 광장과 환구단 그리고 구세군교회와 조선일보 건물이 있던 곳까지 덕수궁터였다. 석조전 뒤편으로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걷다보면 정동공원이 나오는데 공원 위쪽에 구 러시아 공사관의 조망탑이 남아 있다. 을미사변 이후 러시아는 고종이 가장 신뢰했던 나라였다. 고종이 아관파천후 덕수궁으로 환어한 이유도 러시아 공사관이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종이 황제에 오르면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환구단은 현재 프레지던트 호텔 뒤편에 있다. 현재는 황궁우와 석고 그리고 정문만 남아 있다. 황궁우는 선왕의 신위를 모신 단으로 3층의 육각 전각이 웅장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현재 황궁우 주변은 도심속 공원으로 일상에 지친 시민들의 작은 쉼터가 되어 주고 있다.

2012년 8월 19일 일요일

문화유산 답사-경복궁



광화문광장에서 광화문으로 가려면 횡단보도를 두 번 건너야 한다. 광화문에서 오른쪽으로 좀 가면 동십자각이 보인다. 예전에는 경복궁 돌담길을 걸으면서 사거리에 외롭게 서 있는 누각을 별 관심도 없이 지나쳤다. 사실 동십자각은 경복궁 성벽의 동쪽 끝 망루였다. 광화문 앞에는 좌우로 두개의 해태(해치)상이 있다. 해태는 상상속의 동물로 궁궐을 지키는 상징적인 존재다. 경복궁에는 곳곳에서 해태상을 볼 수 있다. 광화문은 2010년에 예전의 모습대로 복원 공사가 완료되었는데 서울의 상징으로 그 위용이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경복궁의 출입구는 흥례문이다.  흥례문은 예전 중앙청 건물이 있던 곳에 복원한 것이다. 중앙청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시피 일제의 조선총독부 건물이다. 조선 왕궁 한복판에 총독부 건물을 세운 것을 보면 일제가 얼마나 교활했었는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한동안 정부종합청사 박물관 등으로 쓰이다가 1996년 역사 바로세우기 차원에서 철거했다.

흥례문을 지나면 또 하나의 문이 보이는데 바로 근정전의 정문인 근정문이다. 마치 양파 껍질 벗기듯 정문을 3개나 통과해야 비로소 근정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멀리 북악산을 배경으로 한 근정전의 풍경은 매우 훌륭하다.


근정전에서 오른편으로 가면 수정전이 있다. 수정전은 과거에 집현전 건물이었다. 수정전 뒤쪽으로는 두개의 굴뚝이 있어서 겨울철에 집무를 보는 신하들을 배려했음을 알 수 있다. 수정전 뒤편에는 경회루가 있다. 북악산을 배경으로 연못위에 떠 있는 경회루의 모습은 한폭의 동양화를 연상시킨다. 경회루는 가장 전형적인 한국의 미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근정전 뒤쪽으로는 왕의 집무실인 사정전이 있다. 사정전의 양 옆으로는 만춘전과 천추전이 있는데,  사정전과는 달리 만춘전과 천추전에는 뒤편에 굴뚝이 있다. 사정전의 오른편으로는 세자가 거처하는 동궁전이 있다. 동궁전에는 현재 자선당과 비현각 두채의 전각이 남아 있다. 자선당은 세자와 세자빈의 거처이고 비현각은 세자가 공부 하고 정무를 보던 곳이다. 사정전 뒤편으로는 왕의 침전인 강녕전이 있고 그 뒤편으로는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이 있다. 강녕전과 교태전의 지붕에는 용마루가 없다는 점이 특이하다.

교태전 뒤편으로는 아미산이라는 정원이 있는데 굴뚝이 무척 아름답다. 교태전의 우측으로는 자경전이 있다. 자경전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궁궐의 어른인 신정왕후를 위해 아주 크고 화려하게 지은 것이다. 신정왕후는 철종의 후계자로 고종을 지명하여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장악하는데 큰 도움을 준 정치적 은인이다. 자경전의 뒤편으로는 십장생굴뚝이 있다. 이것은 십장생을 벽에 새긴 일종의 벽화로 이것은 신정왕후의 만수무강을 기원한 뜻이 있다.

교태전 뒤쪽으로는 후궁들의 처소인 함화당과 집경당이 있다. 원래는 궁녀들이 거처하는 전각들이 더 있었으나 지금은 두개만 남아 있다. 경복궁이 중건되었을 당시에는 지금보다 전각이 훨씬 많아서 아주 웅장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일제가 이런 저런 명목으로 전각들을 하나 둘 해체하면서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한 것을 90년대에 본격적으로 복원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은 그나마 전체적인 형태와 기본 골격은 예전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다.


함화당의 뒤편으로는 향원정이 있다. 향원정의 연못은 온통 연꽃으로 덮여 있었다. 육각의 정자와 아름다운 연못 그리고 뒤편의 북악산이 만들어내는 경치는 경복궁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다. 경복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이 향원정을 꼽고 싶다. 향원정 뒤편에는 건청궁이 새롭게 복원되었다. 건청궁은 고종이 아버지 흥선대원군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지은 작은 궁전으로 일반 양반집의 형태로 지은 것이다. 건청궁에는 왕의 처소인 장안당과 왕비의 처소인 곤녕합이 있다. 곤녕합은 바로 을미사변때 명성황후가 일본의 무사들에 의해 살해되었던 곳이다. 건청궁은 최근에 복원된 것으로 예전에는 빈터 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건청궁 바로 옆에는 집옥재라는 독특한 건물이 있다. 집옥재 좌우에는 팔우정이라는 청나라풍의 팔각형 누각과 협길당이라는 조선풍의 전각이 있어서 청풍과 조선풍이 조화를 이룬 건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팔우정은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전각으로 눈여겨 볼만하다. 집옥재에서 좌측으로 가면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을 볼 수 있다. 신무문 앞은 경복궁의 출입문이 설치되어 있어서 가까이 가보지는 못했지만 멀리서 모양을 확인할 수는 있었다.

신무문에서 다시 내려오면 궁중의 장독대를 모아두었던 장고가 있는데 지금은 팔도의 독 항아리를 전시하는 곳으로 복원해 놓았다. 경복궁 옆에는 국립민속박물관이 있다. 민속 박물관은 예전 한국인의 생활 모습을 전시한 곳으로 사실 그다지 볼 것이 많지는 않다. 이것으로 경복궁 답사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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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8월 8일 수요일

동유럽 여행-자그렙(2)


아침에 일어나서 식사를 한 후 9시 30분쯤 배낭을 메고 호텔을 나섰다. 그리고 공항버스를 타고 두브로브니크 공항으로 갔다.


12시 50분에 두브로브니크 공항을 이륙한 크로아티아 국내선 항공기는 50분만에 자그렙 공항에 착륙했다. 출구로 나와 공항버스를 타고 3일전에 묵었던 두브로브니크 호텔로 갔다.

호텔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3시쯤이었다. 우선 자그렙에서 가장 가 보고 싶었던 미마라 미술관을 관람하기로 했다. 미마라 미술관은 세계 100대 미술관 중 하나로 미마라라는 미술품  수집가의 기증품들을 전시한 곳이다. 미마라 미술관은 호텔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서 걸어서 충분히 갈 수 있다. 미술 전시관에는 르네상스 시대부터 인상주의 시대까지 유명 화가들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주 유명한 작품들은 별로 없었다. 미마라 미술관은 회화 이외에도 동서양의 유물들도 전시하고 있었는데, 중국과 일본 동남아시아의 도자기와 수공예품들도 볼 수 있었다. 미마라 미술관에서는 또한가지 아주 흥미로운 동상이 전시되어 있었다. 바로 바다밑에 침몰해 있던 약 2300년전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청동 조각상을 인양해서 복원한 작품이다. 조각상의 주인공은 고대 그리스의 운동 선수로 추정되는 건장한 체격의 청년이었다. 2300년동안 바다밑에 있었다는 것도 놀랍지만 바닷속에서 부식되고 변형된 동상을 원본 모습 그대로 복원한 복원 기술도 놀라웠다. 동상은 마치 살아 있는 듯한 생명력이 느껴졌다.

미마라 미술관 관람 후 자그렙의 거리를 둘러 보았다. 그리고 자그렙 대성당도 한 번 더 구경하였다. 마침 대성당 정문이 열려 있어서 안에 들어가 보았다. 성당 내부도 외부와 마찬가지로 웅장했으며 화려하지는 않지만 자그렙 성당만의 독특함이 있었다. 저녁 예배가 시작되자 정문이 닫혀서 후문으로 빠져나왔다. 내일 아침 7시 5분 파리행 비행기를 타야 했기 때문에 오늘은 일찍 호텔로 들어가서 쉴 생각이다. 이것으로 18박 19일에 걸친 동유럽 여행이 마무리 되었다.

▶자그렙 여행 사진들

2012년 8월 7일 화요일

동유럽 여행-두브로브니크(2)


호텔 레스토랑에서 아침식사를 한 후에 두브로브니크 올드 시티 투어에 나섰다.

호텔에서 약 40분 정도 걸어서 올드시티에 도착했다. 두브로브니크는 작은 도시지만 중세 시대부터 독립을 유지해온 자치 도시로서 오랫동안 자유와 번영을 누려 왔다.

올드시티는 도시 전체가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 쌓여 있다. 성벽은 육지뿐만 아니라 바닷가에도 둘러 쳐져 있어서 육지 뿐만 아니라 해상의 침입으로부터도 철저히 방비를 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만큼 두브로브니크 사람들은 자유와 독립를 소중히 생각했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였다. 성벽 둘레로는 깊은 도랑이 있고 성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도랑 위에 다리처럼 놓여진 필레문을 통과해야 한다. 필레문은 평소에는 도랑위에 놓여져 있지만 비상시에는 들어 올려져 성문이 된다.

필레문을 지나서 올드시티로 들어가 보았다. 지상의 마지막 낙원, 평생에 한번은 가보아야 할 도시라고 칭찬이 자자하지만 올드시티는 세계 각지에서 온 관광객들로 인산인해였다. 뜨거운 태양과 수많은 인파 때문에 중세 도시의 매력이 반감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나마 두브로브니크 다운 면을 느낄 수 있는 곳은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골목길이다. 골목길에 들어서면 비로소 사람 사는 정취가 느껴진다. 빨래줄에는 빨래가 걸려있고 부엌에서는 요리를 만드는 소리가 들려온다. 소란스러운 관광객들 틈에서 벗어나 한적한 골목길에 들어서면 비로소 소박한 사람들이 평범한 일상을 꾸려가고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훈훈한 옛 추억이 느껴지는 아기자기한 골목길이야말로 두브로브니크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계단으로 이어진 좁은 골목길을 올라가자 높은 성벽이 보이고, 성벽 위로 사람들이 걸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성벽 옆에 계단이 있고 계단 끝에 문이 열려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계단을 올라가서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바로 성벽길로 연결되었다. 그런데 다시 내려다 보니 내가 들어왔던 문이 다시 잠겨 있었다. 아마도 임시로 열어두었던 모양이다. 성벽 둘레길은 좁기 때문에 관광객들은 거의 일렬로 걷고 있었다. 나도 관광객들을 따라 성벽둘레길 투어를 시작했다.

성벽에서 바라본 올드 시티는 에메랄드빛 바다에 둘러싸인 붉은 지붕의 집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지상의 낙원이라는 표현에 걸맞는 멋진 풍경이었다. 성벽에서 성안을 바라 보면 중세의 낡은 집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정원에는 관광객들이 보건 말건 상관없이 빨래가 널려 있어 소박한 정취가 느껴진다. 광장 분수대 주변에는 수많은 관광객들의 모여 있다. 그리고 곳곳에 아담한 교회의 첨탑들도 눈에 띄었다. 성벽길을  걷다 보면 여러개의 망루가 있는데 그곳에서는 주변의 경치를 더 잘 볼 수 있다. 푸른 바다의 물살을 가르며 나아가는 보트들이 보였다. 바다의 색깔은 에머랄드색보다 더 진한 약간 검은 빛이 느껴진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아드리아해의 바다는 정말 아름답다. 중세의 추억을 간직한 골목길 만큼이나 환상적인 바다의 경치도 두브로브니크의 빼놓을 수 없는 매력 중 하나다. 성벽 아래의 바위에는 파라솔이 보이고 물속에 뛰어들어 수영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성벽길 투어를 마치고 입구의 계단을 통해 메인스트리트로 내려왔다. 메인스트리트는 필레문에서 올드포트입구까지 연결된 광장처럼 넓은 거리다. 필레문 입구 앞 광장에는 큰 분수대가 있다. 분수대에는 수도꼭지들이 설치되어 있는데, 사람들은 그곳에서 손과 얼굴을  씻었다. 나도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과  머리를 물로 흠뻑 적셨다. 어떤 사람들은 페트병에 물을  담아서 마시는 사람들도 있었다. 마셔도 괜챦은 것인지 의심이 가기도 했지만 나도 페트병에 물을 담았다. 유럽은 상수도 시설이 발달되어 있어 수돗물을 마시고 탈이 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메인스트리트를 걸어서 올드포트 입구까지 오자 가이드북에서 보았던 석상이 눈에 띄었다. 바로 올란도 게양대였다. 올란도는 두브로브니크의 자유를 위해 싸웠던 용맹한 전사였다. 올란도 게양대는 자유의 도시 두브로브니크의 상징이다. 조각상 옆에도 큰 분수대가 있었다. 그곳에서도 사람들은 세수를 하고 물을 마셨다. 입구를 빠져나와 올드포트에 가보니 그곳에는  수많은 보트들이 정박해 있었다. 성벽 옆에 펼쳐진 바다 그리고 부두와 산기슭의 집들이 한데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경이 보였다. 다시 올란도 게양대 쪽으로 와서 이번에는 왼쪽 골목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곳에는 광장과 재래 시장이 있고 좀더 걸어 올라가면 오래되고 낡은 집들과 교회가 보였다. 다시 광장으로 내려와서 왼쪽 거리로 들어섰다. 그 거리는 기념품가게와 옷가게들이 들어서 있는 두브로브니크의 작은 번화가였다. 골목을 돌아나와서 다시 메인스트리트에 들어섰다.

필레문 입구 앞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 두 개가 서로 인접해 있는 모습이 보인다. 한 교회는 출입문이 닫혀 있어서 관광객들이 많이 드나드는 교회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다른 도시의 성당들에 비해 내부는 화려하지 않고 단순하면서도 소박한 중세 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다시 메인스트리트로 나와서 주변 건물들을 감상하였다. 건물들은 모두 사암 벽돌로 지어진 것으로 붉은 벽돌을 사용하는 르네상스 양식보다는 이전의 양식으로 올드 시티가 중세 도시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건물의 디자인도 다른 유럽의 도시와 달리 독특하면서도 화려하지 않고 소박한 것이 특징이다.

오후 3시가 넘었는데도 한낮의 더위는 수그러들 기세를 보이지 않는다. 수퍼마켓에서 맥주를 사서 거리에서 마셨다. 두브로브니크의 올드시티는 마음만 먹으면 두 시간 정도면 충분히 돌아볼 수 있다. 하지만 골목 골목마다 숨겨진 매력들을 음미하면서 구경하자면 하루로도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작은 골목길의 계단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대부분 카메라를 들고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면서 사진을 찍기 바쁘다. 하지만 사진으로 남기는 것보다는 가슴으로 더 많이 느껴야 여행의 잔상이 오래 남는다. 골목길의 집들은 매우 가까워서 창문을 통해 이웃끼리 이야기도 나누고 심지어 사과나 토마토 같은 과일들을 주고받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도 해본다. 그런 상상들을 하면서 골목길을 감상하니 두브로브니크가 인간적인 정취로 충만한 곳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뜨거운 태양과 하루 종일 싸워야만 했던 오늘은 이번 여행에서 가장 힘든 하루로 기억될 것이다. 힘들었던 만큼 가장 기억에 남는 날이 될 것이다. 오후 5시밖에 되지 않았지만 오늘은 일찍 투어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필레문을 통해 올드시티를 빠져나와 버스를 타고 호텔로 돌아왔다. 오늘은 어제처럼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지 않고 인근 마트에서 빵과 우유를 사서 호텔 룸에서 먹기로 했다. 룸에서 휴식을 취한 후 저녁 8시 반 쯤 항구의 야경을 감상하기 위해 다시 호텔을 나섰다. 어제처럼 마트에서 캔맥주를 사서 항구의 벤치에 앉아서 마셨다. 부두에는 두척의 유람선이 바다의 야경을 감상하려는 관광객들을 태우고 있었다. 유람선들은 그다지 크지 않은 옛날 범선 모양의 보트로 관광객들을 배 안 가득 싣고는 무드 있는 음악을 틀면서 부두를 떠났다. 어둠이 깔리고 거리마다 불이 들어오면서 어제와 마찬가지로 고요한 정적이 흐르는 항구의 야경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두 번째로 보아서 그런지 어제와 같은 특별한 감흥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 호텔로 돌아와서 샤워를 하고 일찍 잠을 청했다. 여행 중에는 불면증에 시달릴 일이 없어서 좋다. 침대에 누워 있다 보면 어느새 잠이 든다.

▶두브로브니크 여행 사진들

2012년 8월 6일 월요일

동유럽 여행-두브로브니크(1)


이번 여행의 마지막 도시인 두브로브니크는 자그렙에서 비행기로 약 50분 정도 걸린다. 지상의 낙원 죽기전에 꼭 가보아야 할 곳이라고 책이나 인터넷에서 칭찬이 자자한 도시다. 다소 선정적인 칭찬에 낚여서 두브로브니크를 일정에 넣었지만 그만큼 기대도 큰 도시다.

비행기는 오후 2시 30분 쯤 두브로브니크 공항에 착륙했다. 두브로브니크 공항은 주변이 온통 나무 한그루 없는 황량한 벌판이다. 출구로 나오니 공항 앞에는 한대의 셔틀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두브로브니크 시내로 가는 직행버스로 비행기 착륙 시간에 맞춰 승객들을 태우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공항에서 두브로브니크 시내까지는 약 30분 정도 걸렸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차창 밖으로 펼쳐진 아드리아해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수 있었다. 버스는 올드 시티 필레문 앞에서 승객들을 내려주었는데, 그곳은 관광객들로 인산인해였다. 뿐만 아니라 도로는 버스와 택시 그리고 승용차로 거의 주차장을 방불케 했다.

버스로 호텔을 찾아간후 호텔 방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호텔을 나와서 호텔 주변을 산책하기로 했다. 저녁은 오랜만에 호텔 레스토랑에서 먹기로 했다.


이곳은 야경이 아주 멋있을 것 같다. 그래서 호텔에서 저녁을 먹고 다시 내려와서 항구의 야경을 감상하기로 했다. 저녁을 먹기 위해 다시 호텔로 발길을 돌렸다. 돌아오는 길에 거미줄처럼 얽힌 두브로브니크의 골목길을 걸어 보았다. 그 골목길들에서는 마치 서울의 옛 동네를 걷는 것처럼 추억과 향수가 느껴졌다. 그런데 이런 좁은 골목길이 마치 미로처럼 끝없이 이어져 있다. 그래서 이곳에 오래 산 사람이 아니라면 골목길을 걸어서 목적지를 찾아가기는 무척 어려울 것 같았다. 처음에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하고 골목길로 접어들었으나 방향감각을 잃어버려 결국 대로로 빠져 나오는 수 밖에 없었다.



저녁 식사 후 방에서 잠시 쉰 후에 다시 호텔을 나왔다. 그리고 호텔 옆에 있는 마트에서 콜라와 맥주를 사 가지고 항구로 내려갔다. 밤 9시쯤 되자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면서 항구 도시에도 서서히 불이 켜지고 있었다. 그리고 완전히 어둠이 깔리자 짙은 어둠에 불빛만 보이기 시작했다. 항구의 야경을 마지막으로 본 기억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도심의 야경과는 또 다른 맛이 느껴졌다. 나는 벤치에 앉아서 캔맥주를 홀짝홀짝 마시면서 두브로브니크의 아름다운 야경에 점점 빨려들어 갔다. 멋진 야경을 감상하고 나니 힘들었던 하루의 피로가 싹 날아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별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던 두브로브니크에 대해서 정말 한번쯤은 와 볼만한 도시라고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두브로브니크 항구의 야경은 정말 인상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