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24일 금요일

문화유산답사-덕수궁


덕수궁의 원래 이름은 경운궁이다. 덕수궁이란 명칭은 고종황제의 휘호가 ‘덕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일제에 의해 강제적로 퇴위당한 고종황제의 휘호를 그대로 썼기 때문에 이 또한 문제가 있어 보인다. 어쨌든 덕수궁은 고종황제가 아관파천후에 약 10년간 대한제국의 황제로 군림했던 곳이고 함녕전에서 돌아갈 때까지 머물렀던 궁이다.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을 들어서면 금천교가 보인다. 물이 흐르지 않기 때문에 다리라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지만 금천교를 지나면 우뚝한 나무들이 있는 아름다운 산책로가 펼쳐진다. 산책로를 따라 걷다보면 중화문이 보이고 중화문을 지나면 중화전이 보인다. 중화전은 덕수궁의 정전으로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과는 몇가지 차이점이 있다. 이층으로 된 월대에는 난간이 없고 석수도 없다. 그리고 근정전이 복층인데 비해 중화전은 단층이고 창호도 푸른색이 아닌 황제를 상징하는 노란색이다. 뿐만 아니라 월대의 돌계단에 있는 답도에는 봉황이 아닌 용이 새겨져 있어서 이곳이 황제가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중화전 뒤편으로는 석어당과 즉조당이 있다. 석어당은 덕수궁의 유일한 2층 전각으로 단청이 없는 것이 특이하다. 이곳은 광해군 때 인목대비가 유폐되었던 곳이다. 전각의 2층은 마치 다락방처럼 슬림한 것이 이색적인데, 이런 양식의 전통 가옥은 쉽게 보기 어려울 것 같다.

즉조당은 고종이 황제즉위식을 가졌던 곳이다.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을 겪으면서 고종은 마음을 굳게 먹고 나라를 일신하기 위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변경하고 황제에 오른다.


고종은 급진적인 개화나 척화론을 모두 배격하고 과거의 것을 존중하면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의 정신을 슬로건으로 내 걸었다. 외세에 의존한 급진개화사상이나 서구문물을 무조건 반대하는 위정척사사상을 배제한 중용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석조전은 우리나라 궁궐에 남아 있는 유일한 서양식 건물이다. 석조전은 신고전주의 양식의 고종의 의지로 지어진 건물이다. 지금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일제에 의해 경복궁과 창경궁에 지어졌던 서양식 건물들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석조전은 현재 준공 당시 내부 모습을 복원하기 위해 공사중이다. 석조전 앞에는 분수대와 정원이 있다. 이것은 영국인 건축가에 의해 지어진 서양식 정원이다. 석조전 옆에는 별관 건물이 있는데 현재는 덕수궁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석어당에서 정문쪽으로 내려오면 침전인 함녕전과 덕홍전이 있다. 함녕전은 고종이 승하한 곳으로 내부에 서양식 샹들리에가 있는 것이 특이하다. 고종은 서양 문물에 관심이 많았고  이를 받아들이는데 매우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함녕전에서 뒤편으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정관헌이 나온다. 이 건물도 참 독특하다. 이곳은 고종이 휴식을 취한 정원인데 전통적인 정자가 아닌 서양식 건축이다. 러시아의 건축가 사바친이 설계하였는데 전체적인 모습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처럼 보이지만 기둥이 나무고  전통 한옥처럼 팔각 지붕이지만 처마는 없다. 정관헌은 전통건축과 서양건축을 융합시킨 독창적인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으로 덕수궁 관람을 마쳤다. 현재의 덕수궁은 고종 당시에 비해 많이 축소된 것이다. 현재 시청앞 광장과 환구단 그리고 구세군교회와 조선일보 건물이 있던 곳까지 덕수궁터였다. 석조전 뒤편으로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걷다보면 정동공원이 나오는데 공원 위쪽에 구 러시아 공사관의 조망탑이 남아 있다. 을미사변 이후 러시아는 고종이 가장 신뢰했던 나라였다. 고종이 아관파천후 덕수궁으로 환어한 이유도 러시아 공사관이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종이 황제에 오르면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환구단은 현재 프레지던트 호텔 뒤편에 있다. 현재는 황궁우와 석고 그리고 정문만 남아 있다. 황궁우는 선왕의 신위를 모신 단으로 3층의 육각 전각이 웅장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현재 황궁우 주변은 도심속 공원으로 일상에 지친 시민들의 작은 쉼터가 되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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